<편집자주>
당진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 또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미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 상황에 놓인 마을 등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힐지도 모르는 마을들이 존재한다. 지역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마을의 이야기를 신문 지면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기록한다.
※ 이 기사는 2024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지역 주민들에게 당진의 관문이자 대표 항구로 기억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오섬이다. 과거 섬이었던 오섬이 육지로 바뀌면서 현재 송산면 오도리가 됐다.
오도리는 동쪽으로 당산1리, 북쪽으로 당산2리, 서쪽으로 고대면 슬항리, 남쪽으로 칠절리 등 4개 마을과 인접한 마을이다. 지형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오섬(鼇島, 오도)이라 불렸다고 한다.
오슴, 오도 등으로 불린 오도리는 큰오섬, 작은오섬, 뱃터, 들마당, 북성거지 등의 작은 자연마을이 있었다.
김금자 노인회장은 “바다로 뚝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고 육지하고 접한 섬이었다”면서 “전설에 의하면, 산(큰오섬)이 고대면 마을과 붙어 있었는데 삼신할머니가 산꼭대기에 올라 호미로 자꾸 파다가 갈라졌고, 그곳으로 물이 들어와서 섬이 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산에 칡이 많은데 칡으로 이쪽 산과 저쪽 산을 연결해서 타고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도리에서 태어나 줄곧 오도리에서 살고 있는 김재선 부녀회장은 “비가 많이 와 둑이 터지면 물에 휩쓸려 죽을까봐 사람들이 산(큰오섬) 꼭대기로 올라갔다”면서 “산 꼭대기에서 종을 치면 주민들은 산에 올라갔다가, 물이 빠지면 내려가고 그랬다”고 전했다.


인천행 여객선 다니던 오도항
과거 이곳은 당진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였단다. 이곳에는 제법 큰 항구가 있었고, 특히 인천가는 여객선이 기항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재선 부녀회장은 “옛날에 아버지가 똑대기(배) 사업을 했다”면서 “배를 태워 인천으로 사람을 데려다주고, 인천에서 당진으로 물건파는 장사꾼이 와서 물건도 팔곤 했다”고 말했다.
국순자 주민은 “이 동네에 배가 많이 다녔는데, 여기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올라가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면서 “또한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피난 온 피난민들도 많이 와서 살았다”고 말했다.
김금자 노인회장은 “연평도 가서 조기 잡아오는 배도 이곳을 드나들었다”면서 “어선이 오면 당진시내에서 쌀과 곡식을 이고 진 사람들이 와서 생선과 바꿔 가져갔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래서 마을에 주민이 100여 가구가 넘었다고 한다”면서 “과거에는 이곳이 당진시내보다 더 번화가였다”고 전했다.
한편 마을회관 앞 마당에는 ‘당진축항준공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1935년 오도항의 항구 축조 공사를 준공하면서 세운 것이다. 항구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사람들의 기억으로만 남게 되면서 기념비도 잊혀져갔던 것 같다. 논둑에 묻혔던 기념비를 마을주민들이 2022년 복원해 마을회관 앞에 다시 세웠다.
또한 항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마을에는 소금창고가 있다. 현재는 소금창고 1개가 마을에 남아 있으며, 아미미술관 박기호 관장이 예술창작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끈 매달아 주민 소통”
여객선 운항이 줄고 석문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오도리는 농촌마을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인구도 줄었다. 이제 오도리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으로 생게를 유지하고 있다.
최창균 오도리 이장은 “현재 오도리 가구 수는 30가구이고, 주민은 약 79명이 생활하고 있다”면서 “농업으로 전환돼서 쌀만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선 부녀회장은 “비가 많이 와서 갯고랑에 물이 넘으면 주민들이 살기가 어려웠다”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새마을운동으로, 주민들이 손수 자갈을 깨서 축을 만들어 간신히 살았다”고 전했다. 김금자 노인회장은 “바닷물이 안 들어올 때는 바위를 타고 걸어가면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면 못 지나가고 주민들이 빙 돌아서 가야 했다”면서 “새마을사업으로 주민들이 도로를 만들어서 이후부터는 리어카도 다니고, 차도 다니게 변했다”고 덧붙였다.
김금자 부녀회장은 “플라스틱을 집집마다 하나씩 매달아서, 집에서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끈으로 잡아당겨서 소통했다”면서 “끈을 잡아당겨서 ‘딸랑’하면 ‘저 집에 무슨 일이 있구나’하고 알았다”고 말했다.

이기정 할머니의 아들딸 된 주민들
한편 마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인 이기정 할머니가 살았었다. 할머니가 송산면 오도리에 거주하던 당시 옆집에 살던 손연애 주민이 할머니를 많이 보살폈다고. 이기정 할머니는 충남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였다. 폐가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지난 2017년 11월 향년 94세 나이로 별세했다. 이기정 할머니 장례는 당진시 최초로 시민장으로 치렀던 가운데 최창균 이장이 상주 노릇을 하고, 오도리 주민들이 함께 장례를 도왔다. 최창균 오도리 이장은 “장례 기간 동안 마을주민 모두 함께 밤을 지새우며 아들딸 노릇을 했다”면서 “천안에 안장된 묘지에도 모두 따라가 마지막 가는 길을 엄숙하게 모셨다”고 전했다.
“현재 오도리는 주민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고령이지만 모두 부지런하게 생활해요. 새벽 3시만 되면 할머니들은 밭에 나가 풀을 뽑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게 건강의 비결인가 봐요. 마을 인구 중 제일 젊은 사람이 약 20명인데 주로 80대에요. 우리는 장수마을로서, 주민들이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