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행담도는 주민의 삶과 공동체가 살아 숨 쉬던 터전이었으나, 서해대교 건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그 역사가 점차 잊힌 공간이다. 당진시대가 행담도의 생활사를 추적하며 지역민조차 알지 못했던 섬사람들의 100년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번 기획을 통해 행담도에 보존 가치가 있는 세부 공간을 시민과 함께 발굴하고, 이를 콘텐츠로 완성할 예정이다. 개발로 의미를 잃어버렸던 행담도의 공간을 ‘역사를 품은 제3의 공간’으로 재창조하고 다시 시작된 행담도의 개발과정에 공간의 가치가 배제되지 않도록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예정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들이 자연스레 속도를 늦추는 지점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러봤을,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행담도 휴게소다. 행담도 휴게소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작은 외딴 섬마을이었다.
지금은 쉽게 갈 수 있는 행담도지만, 과거 이곳에는 제대로 된 선착장조차 없었다. 행담도 주민들은 육지로 나가려면 노를 저어 나가는 배에 몸을 맡겨야 했고, 바닷물이 차오른 해안 아무 곳이나 내려야 했다. 차디찬 겨울 바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로는 위험했고, 배를 타지 못하는 날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러던 어느 날, 섬에 선착장이 생겼다. 번듯한 선착장이 아닌 단순한 구조물이었지만 마을의 삶은 그 이후로 달라졌다. 선착장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 행담도의 삶을 들여다봤다.

행담도 배의 변천사
행담도 사람들에게 배는 제2의 발이었다. 그리고 생계 수단이었으며 생명이었다. 배가 있어야만 육지와 소통할 수 있었다. 당진시가 발간한 행담도 구술채록서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에 따르면, 시대에 따라 배도 달라졌는데, 황포돛배부터 시작해 충남교육청 목선, FRP배(섬유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배), 나비배, 기계배(동력배) 수순으로 변화했다. 또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여객선과 도선, 진료를 위해 오는 병원선이 섬과 육지를 이었다.
황포돛배는 통나무를 깎거나 덧대 만들었는데, 튼튼했지만 만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무거웠다. 바람이 불 때는 바람의 힘으로,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노를 저어야 했던 배다. 이 황포돛배를 소유한 이는 행담도에 세 가구만이 유일했다. 그 후 충남도교육청에서 행담도에서 유일했던 행담분교를 오가는 교사들을 위한 돛배를 장만해 4대까지 늘어나게 된다.

날개짓 하는 것 같았던 나비배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나비배였다. 마치 배를 타고 노를 젓는 모습이 나비가 날개짓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나비배’로 불렸다. 이 나비배는 행담도 주민에게는 일종의 자가용이었다. 합판을 덧대 만들었는데,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고 가벼워서 힘도 적게 소요됐다. 그래서 집마다 나비배가 한 대씩 있었을 정도였다. 나비배 덕분에 인근 바다와 육지로 오가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기계배(동력배)가 들어오게 된다.
삽교호 방조제 공사가 끝난 후에는 행담도에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하며, 삽교호-행담도 간 도선이 운행됐다. 또 수시로 유람선이 삽교호와 행담도를 오갔으며, 한 달에 한 번 행담 주민들을 위해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선이 운행됐다.
“나 좀 데리고 가라!”
배의 변화와 함께 눈여겨볼 것이 ‘선착장’이다. 나비선이 오갈 때만 해도 행담도에는 선착장이 따로 없었다. 온 사면이 바다인데도 선착장이 없었을 만큼 행담도는 작은 시골 섬이었다. 선착장이 없어 불편했지만, 그때만 존재했던 낭만도 있었다.
선착장 바로 앞에 살던 표선동·김종순 부부는 아직도 그때의 일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선착장도 없고,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배가 없었을 때는 ‘끝망울’이라고 불렸던 음섬포구에서 연신 손을 흔드는 것이 행담도와의 연락 수단이었다. 행담도에 대고 “데리고 가라”며 소리를 질러야 했고, 밤이 될 때는 행담도에서 잘 보일 것 같은 곳에 불을 놓아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끝끝내 행담도 주민들이 발견하지 못할 때는 육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김종순 씨는 “행담도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육지에서 팔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배가 없어 행담도로 못 갈 때가 있었다”며 “그럴 때는 육지 사람들에게 사정해서 하룻밤 묵는 등 신세를 많이 졌다”고 말했다.
행담도 주민들을 재워 준 정우찬 매산2리 개발위원장은 “행담도 주민들이 배가 없을 때 집으로 찾아와서 재워주기도 했다”며 “행담도 주민들하고도 잘 알고 지냈다”고 회상했다.

배 세울 곳 없어 아찔한 순간도
선착장이 없어 위험천만한 순간들도 있었다. 배를 따로 세울 곳이 없으니, 조수에 따라 그때마다 정착하는 곳이 달랐다. 선착장이 없으니 배에서 내리는 곳은 바다 위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기우는 나비배에서 내리려다가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배에서 내리다가 암초에 부딪혀 다치는 사고도 비일비재했다. 김종순 씨 역시 그때 다친 팔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육지에서 손님들이 올 때는 배가 올 법한 곳으로 미리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들을 업고 바닷물을 건너기도 했단다. 겨울의 차디찬 바다는 고역 수준이었다. 추운 바닷물에 담긴 발은 발바닥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일도 빈번했다.
당진군 오가며 선착장 요구
선착장이 없어 불편을 겪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나섰다. 당시 당진군을 오가며 선착장을 지어달라고 수년에 걸쳐 건의했다. 하도 건의한 탓에 ‘행담도지사’라고 불렸던 표선동 씨는 “70m의 선착장을 만들기 위해 행담도에서 배 타고, 버스 타고, 걸어서 숱하게 당진군을 오갔다”고 말했다.
선착장이 생긴 후에 동네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유람선과 도선이 오가면서 관광객들도 ‘물 밀 듯이’ 들어왔다. 이전에는 인근 육지에서 행담도로 건너와 잠시 놀다 가는 정도였다면, 이후에는 단체객들이 행담도를 찾았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선착장 주변으로 해산물 파는 주민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엎은 고무통 위에 쟁반을 올리고 의자 대신 스티로폼을 둘러 상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행담도에서 캔 신선한 굴을 한 접시씩 팔았다. 이전만 해도 바다 건너 육지에 해산물들을 이고 지고 가야 팔았다면, 선착장 이후에는 ‘직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소득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하루에 1000여명의 관광객이 오는 날
도 있었어요.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관광배 기사가 그 전날 미리 와서 주문을 하고 다음 날 관광객들을 데리고 왔죠. 장사가 잘될 때는 물건이 없어서 손님을 못 받을 정도였어요. 장사가 되기 시작하니 선착장 앞에서 장사하는 주민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죠.”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선착장
관광객이 늘면서 작은 민박집도 생기고, 또 주민들이 마을 버스처럼 오갈 수 있는 도선까지도 등장하게 된다. 선착장이 생기기 전과 후에 따라 동네의 모습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섬과 마을을 잇는 통로였던 선착장은 현재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대부분 개발 공사 과정 중에서 소실됐지만, 모다아울렛 앞쪽으로 아주 일부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표선동 씨는 “남아 있는 선착장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며 “점점 사라지고 있는 행담도의 모습을, 그 당시의 살았던 과정을 담아낸 곳이 휴게소 한 편에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