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행담도는 주민의 삶과 공동체가 살아 숨 쉬던 터전이었으나, 서해대교 건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그 역사가 점차 잊힌 공간이다. 당진시대가 행담도의 생활사를 추적하며 지역민조차 알지 못했던 섬사람들의 100년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행담도의 역사 발굴은 분명 지역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지역민에게 ‘고속도로 휴게소’ 그 이상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당진시는 민자유치를 내세우며 다시 한번 거대자본의 행담도 개발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행담도 원주민의 숙원인 역사관 건립이나, 행담도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개발 내용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번 기획을 통해 행담도에 보존 가치가 있는 세부 공간을 시민과 함께 발굴하고, 이를 콘텐츠로 완성할 예정이다. 이번 기획을 통해 의미를 갖지 못하던 행담도의 공간을 ‘역사를 품은 제3의 공간’으로 재창조하고 행담도의 개발과정에 공간의 가치가 배제되지 않도록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목적을 갖는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시와 소설로 독립을 외쳤던 심훈 선생. 1901년에 태어나 193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제에 저항하는 문학 작품을 집필하며 우리 민족의 항일 의식을 대변했던 인물이다. 심훈 선생은 당진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필경사’를 짓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마지막 집필 활동 중 <7월의 바다>라는 짧은 수필을 남겼고, 해방을 보지 못한 채 35살의 젊은 나이로 전염병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개발 논리에 잊혀 가고 있던 행담도의 과거를 쫓았다. 역사 속 한 조각에 심훈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훈 선생이 작고하기 전에 집필한 수필 <7월의 바다>는 그가 ‘가치내’라고 불렀던 행담도에 관한 이야기다. 점점 생명의 불꽃은 꺼져가고, 그리고 억압된 일제강점기에 희망이 사라지고 있을 때, 심훈 선생은 이 가치내라는 섬에서 ‘옥동자’를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 옥동자가 그에게 사라져 가는 희망의 불씨였지 않을까.


<7월의 바다> 속 갓난 아기, 옥동자를 찾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심훈 선생의 <7월의 바다> 속 ‘옥동자’ 찾기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 그 시작은 행담도 원주민인 이익주 씨를 통해 시작됐다. 심훈 선생이 이 수필을 발표한 것은 1935년이다. 글의 묘사로 보았을 때, 심훈 선생은 1934년 여름에 행담도를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90여 년이 지난 일이다. ‘옥동자’라는 실존 인물을 찾을 수 있을까. 단서를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은 미지수였으나,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심훈 선생이 1934년에 행담도에 방문해 옥동자를 만났으니, 1934년생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옥동자라는 표현해서도 알 수 있듯 사내아이일 가능성이 크다. 또 수필 속 조류에 밀려 ‘표류하듯’ 도착한 곳이 현재의 홍화벌 부근이라는 추정을 추가하면 ‘옥동자’가 살고 있던 집은 1930년대 지도에 민가로 표시된 해안, 홍화벌 근처였을 것이다.

‘1934년생·남자·홍화벌 부근 거주’
실존 인물인 옥동자에 대한 세 가지 조건이 나왔다. 1934년생과 남자, 그리고 홍화벌 부근의 민가에 거주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조건만으로도 찾는 건 쉽지 않을 터, 하지만 원주민 이익주 씨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도착했다. “행담도에서 태어난 어르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인물이 1933년, 올해 93세인 이차분 할머니였다.
이차분 할머니 아래로는 연년생인 남동생 故 이차석 씨가 있다. 이차석 씨가 태어난 해가, 바로 심훈이 이 섬에 방문했던 1934년이다. 이때 외삼촌의 아들인 김진영 씨도 1934년에 태어난 것으로 할머니는 기억했다. 후보가 두 명으로 좁혀진 것이다.
이때 또 다른 행담도의 원주민 한만정 씨의 말도 따랐다. 그는 “우리 집이 행담도에 들어온 것은 1940년대고, 그 전에 김진영 씨 일가가 이미 (행담도에) 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어쩌면 김진영 씨가 심훈의 ‘옥동자’일 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렸다.

1934년생의 그 아이를 찾다
좀 더 정확한 근거를 찾아 나섰다. ‘옥동자’의 두 후보인 이차석 씨와 김진영 씨의 제적등본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때 이익주 씨는 멀리 타지에서 서류를 수집하는 수고도 자처했다. 그렇게 김진영 씨의 제적등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된 내용은, 그의 출생은 대정 6년, 즉 1938년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송악면 월곡리가 본적이었으며 1940년에 이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7월의 바다>가 집필된 시점에 김진영 씨는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일가 역시 이후에 행담도에 정착했다.

다음은 이차석 씨였다. 이차석 씨의 제적등본에는 1934년 10월 출생으로 명시돼 있다. 심훈이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되던 해에 태어나 수필 속의 묘사에 부합했다. 다만, 심훈 선생의 수필 제목으로 보았을 때 7월에 방문했다면 이차석 씨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다. 당시에 그랬듯, 이차석 씨의 호적이 늦게 올라갔거나 또는 심훈 선생이 7월이 아닌 그 이후에 방문한 뒤 수필을 집필한 것이라면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의 지도에는 홍화벌 해안 부근에 4곳의 민가가 표시돼 있다. 이차분 씨는 “그 집들은 우리집과 외삼촌, 고모, 그리고 류 씨 성을 가진 집”이라고 기억해 냈다. 이어 “우리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행담도에 정착했고, 외삼촌과 고모, 류 씨네가 나중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따라서 <7월의 바다>에 나온 오막살이의 실제 위치가 이차분 어르신의 집일 가능성이 높다.
수필 속에서 심훈 선생은 행담도에서 만난 노파에게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냐며 묻는다. 이때 노파는 “여북해야 인간 구경도 못 허구 이런데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라고 답한다.

지명조사철 문헌에 따르면 1910년대 행담도에 부락이 형성된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앞서 1879년에 간행된 ‘조선국충청도착지’에도 민간 3채가 기록된 것으로 보면, 행담도에는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존재했다.
실제 이차분 할머니의 가족은 행담도에서 방 두 칸과 부엌 하나가 딸린 초가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초가라고 말하기에도 궁색한 집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빨래와 생선을 말리는 좁은 마당 너머로는 신평과 멧돌포가 보였다고 떠올렸다. 수필 속 심훈 선생이 말한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이라는 모습이었을까.

"나 좀 안아 봅시다."
심훈 선생은 척박한 곳에서도 환히 밝히는 이 옥동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이 어린 생명을 떨어지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가치내 섬으로 향한다. 노파와 젊은 며느리를 만났고, 그때의 어린아이를 만나게 된다.
“어린애 잘 자라우?”하고 물으니 때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고 한다. 심훈 선생은 어린 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그리고 말한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쩌면 심훈 선생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되어줬던 존재였을 옥동자 그리고 가치내. 그 희망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7월의 바다> 속 문장들에서 그리고 이차분 할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