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행담도는 주민의 삶과 공동체가 살아 숨 쉬던 터전이었으나, 서해대교 건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그 역사가 점차 잊힌 공간이다. 당진시대가 행담도의 생활사를 추적하며 지역민조차 알지 못했던 섬사람들의 100년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번 기획을 통해 개발로 행담 잃었던 행담도의 가치를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당진 앞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행담도.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고 행담도 휴게소가 들어선 자리지만, 불과 몇십 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던 곳이었다. 그 중심에는 한정초등학교의 분교였던 ‘행담분교’가 있었다.

섬에 찾아온 교육의 불씨

행담도에 처음부터 학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 중반, 취학 연령의 아이들이 늘어났지만 가장 가까운 학교인 한정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만 했다. 당시 노를 저어야 하는 작은 배가 전부였기 때문에, 아이들이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등교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주민 이은영 씨가 집 사랑방을 열어줬다. 서당과 같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천자문 등을 배웠다. 그러던 1960년 여름, 해산물 조사를 위해 섬을 찾은 경희대 학생 조성우 씨가 섬 아이들의 사정을 듣고 그해 10월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는 이은영 씨의 집 한 칸을 빌려 37명의 아이를 가르쳤다. 당시 연필조차 부족한 현실이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알려지자 각계에서 학용품과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

정식 분교의 탄생

조성우 씨가 군 입대를 위해 섬을 떠난 뒤, 교육의 필요성은 더 커졌다. 결국 1961년 3월 1일, 행담분교가 공식 설립됐다. 첫 교사 강전항 씨가 부임했고 당시 아이들은 모두 15명이었다.

행담분교는 생겼지만 교실은 없었다. 사랑방에서 15명이 공부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았다.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강전항 교사는 당시 제자였던 한정만 씨의 뒷방에서 학부모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학교를 짓자는 것에는 모두 동의를 했으나, 어떻게 지을지가 관건이었다. 엇갈린 의견을 19살 강전항 교사가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벽돌로 학교를 세우고 함석 지붕을 올리자고 결정했다. 강전항 교사는 “당시 서울부인회라는 한 단체에서 행담도에 함석을 기증한 것이 집집마다 있었다”며 “흩어져 있는 것을 주민들이 모았고, 육지에서 흙벽돌 만드는 기계를 구해 공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학교 지어준다는 소리에 눈물 흘려

“경숙이라는 학생네 집 앞에 주민들과 만든 벽돌 그리고 함석들을 쌓아 놓았어요. 비나 눈이 올 때 벽돌과 함석이 날라 갈까봐 잠을 못자기도 했었어요. 하루는 본교에 갔다가 비바람이 거세서 행담섬으로 못들어 온 날도 있었어요. 그때 어찌나 걱정했는지요.”(강전항)

어느 정도 밑작업은 했으나 주민들의 힘만으로는 학교를 세우기가 어려웠다. 그때 당시 정만택 군수, 홍명선 과장이 행담분교를 찾았고, 강전항 교사는 학교를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지어주겠다”는 대답에 주민들까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강전항 교사는 바로 학교 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바다 위에 떠다니는 여객선이 보이면서도 양지 바른 곳을 찾아 다녔다”며 “학교 터를 잡고 공사를 할 때 학부모나 학생 모두가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세웠다”고 말했다. 그렇게 1962년 학교가 준공했을 때 주민들은 떡과 명태 등을 가져다 놓고 기념식을 열기도 했다.

당시 행담분교는 교실 한 칸에 교무실과 숙직실, 부엌이 전부였다. 본교로부터 헌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운동장을 새로 만들고, 화장실을 설치하며 점점 구색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학교 종이 없던지라 6.25 때의 흔적이었던 탄피를 주워다 매달고 종으로 쓰기도 했다.

행담분교를 떠나던 그때

첫 교사였던 강전항 교사와 주민은 서로에게 큰 의미였다. 글을 몰랐던 주민들은 강전항 교사를 찾아와 편지를 읽고 써달라고도 하고, 종종 강 교사가 제사 축지방도 대신 써줬다고 한다. 병원이 없던 섬이었던지라, 아이가 아프면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안고 교사를 찾았다. 강 교사는 산에다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판 돈으로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사주기도 했다고.

1965년, 군 제대를 위해 강전항 교사는 섬을 떠나야 했다. 그가 떠나던 날에 학생들과 학부모가 모두 배가 있는 바다로 나와 ‘애국가’를 불렀다. 강 교사는 “나도 ‘우리나라 만세’ 하면서 답을 해줬는데, 슬퍼서 목이 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군에 있을 때 종종 아이들에게서 편지도 왔었어요. 하루는 정순이라는 학생이 ‘저희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선생님과 지냈던 일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도 선생님이 떠나실 때 선생님이 사다 준 하얀 고무신을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어요.“

벽지 교사의 추억들

이렇듯 행담분교의 규모는 작았지만, 이곳을 거쳐 간 교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82년부터 1년간 근무한 하상규 교사는 “43년 교직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라고 말했다. 젊은 열정으로 행담분교 근무를 지원한 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섬에 들어 왔다. 처음 마주한 학교는 열악했다. 섬인지라 바람이 꽤 쎘는데, 그 바람에 유리창이 깨져도 고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찢어진 공책에 짧은 연필로 공부했다. 하 교사는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에게 6장에 이르는 편지를 보내 학용품을 지원 받기도 했다.

여건은 열악했지만, 아이들만큼은 씩씩했다. 1년에 한 번 운동회에서 분교와 본교 아이들이 만났다. 또래여도 같이 만날 일도 없고, 행담분교 아이들의 수도 적어 본교에 가면 분교 아이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운동회에 참가하면 달리기만큼은 행담분교 아이들은 누구에게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만큼은 행담도의 주민들이 일을 멈추고 김밥을 싸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단다.

“섬에 일이 있을 때면 주민들이 늘 도와줬어요. 운동장 풀이 무성하면 함께 낫질하고, 비가 와 운동장이 패었으면 주민들이 와 흙을 메워줬어요. 그 모습을 보면 아이들을 더 잘 가르쳐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굴 따는 아이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근무한 김금중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정초로 발령을 받아 온 그는, 바닷가를 거닐다가 행담도를 보게 됐다. 그곳에도 학교가 있는 것을 알게된 그는 교장을 찾아가 행담분교에 근무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벽지에서 근무한다고 승진 점수를 주지 않을 때였다. 교장은 “왜 그런 곳을 가냐”고 말했을 정도로, 그때만 해도 행담분교에서의 근무는 귀향지나 다름 없었다.

김 교사가 행담분교를 처음 찾았을 때, 당시 전교생은 19명이 전부였다. 교실도 겨우 한 칸에 불과했고 칠판도 하나였다. 교육 여건도 열악했지만, 굴을 따는 등 생계에 관여하고 있던 아이들은 종종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한때는 저녁 시간에 공부시켜봤지만 어려움이 따르자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공부만 시키기도 했단다.

“선생님이 손 흔들면 배 보내라”

김금중 교사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 한 달에 두 어번 본교를 가게 될 때는 아이들에게 “음섬포구에서 손을 흔들면 부모님한테 말해 배를 보내거라”라고 말했다고. 혹시라도 늦어 저녁이 된다면 밤에 불을 피우겠노라고 말해 놓기도 했단다. 하지만 겨울에는 안개로 인해서 낮에 불을 피워도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교사는 행담도를 떠난 후에도 종종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행담섬 이야기를 꺼냈다. 늘 소중히 여겼던 기억이기에 자녀들 역시 행담분교에 애틋했을 정도였다. 그는 “섬에서 태어난 둘째아들(김선주)은 교장으로 부임할 때, 본인이 섬에서 태어났으니 섬 학교에서 첫 교장 근무를 하고 싶다며 인천 영흥도를 가기도 했다”며 “행담도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는 물론 아이들도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행담도의 주민 그리고 아이들은 섬에서 쫓겨 나고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이들이 행담도를 잊지 않고, 그 흔적을 기억하고 살길 바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