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행담도는 주민의 삶과 공동체가 살아 숨 쉬던 터전이었으나, 서해대교 건설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그 역사가 점차 잊힌 공간이다. 이번 기획을 통해 개발로 행담 잃었던 행담도의 가치를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자 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지금의 행담도 휴게소 요금소 뒤편이자 가스주유소 인근에는 행담도의 당산이 있었다. 동쪽 봉우리 꼭대기, 마을을 내려다보던 당산에 우뚝 선 고목은 오랫동안 섬사람들의 신앙 대상이자 공동체의 기둥이었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나무를 베지 않았고, 배가 나갈 때는 좋은 날을 잡아 이곳에서 몇 번이고 절을 하며 ‘무사 안녕, 무사 귀환’을 빌었다.
행담도의 당산은 이제 흔적만이 남아 있다. 한때 신성한 나무가 마을을 지키던 자리에는 잡목과 쓰러진 고목, 그리고 얼마 없는 돌무더기만이 남아 있다.
행담도에서 가장 높았던 당산
행담도에서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었다. 동쪽과 남쪽 그리고 북서쪽이었고 그 사이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 동쪽 방향에 있던 당산이 행담도에서 가장 높았던 산이었다. 당진시가 발간한 행담도의 구술 채록서 <그섬에 사람이 살았네>에 따르면, 이 당산의 정상 높이는 39m로 전해진다.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안녀와 동녘곱이 있었다. 이곳은 마을 주민에게는 안식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매년 정월대보름 이전 당제를 지내며 마을과 가정의 안녕을 빌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전망도 좋아 분교 소풍이나 야외수업을 벌인 단골 장소기도 하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갑갑한 섬 생활에 먼 바다를 보기 위해, 해가 지는 풍경을 보기 위해 당산을 올랐다고 한다.

커다란 나무와 돌 제단
이 당산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성하게 여겼기에 누구도 함부로 베지 않았다. 혹여 베는 날에는 큰 화를 입는다고 믿었다. 실제로 누군가는 이 나무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나무 앞에서 행담도 주민들은 당제를 지냈다. 바닷일을 하러 나갈 때쯤인 정월 보름 이전이나 혹은 배가 나갈 때면 주민들은 당산을 올랐다. 주민들은 떡을 쪄 올리고, 직접 빚은 술까지 돌로 만든 제단에 올렸다. 가끔은 돼지머리가 올라오기도 했다.
바다는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언제든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실제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행담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는 이들의 무사귀환을 빌었고, 안전하게 배가 들어오면 또 감사하다며 제를 올렸다.
“어머니가 당산에 올라 제를 지내던 것이 기억나요. 고사를 지내기 전 음식 만들 때 몇 가지 지켜야 할 것들도 있었어요. 그만큼 주민들은 당제를 신성하게 여겼어요.”(행담도 주민 김미정 씨)
소지가 올라가면 “다행이다”
당제에도 행담도만의 제사 문화가 있었다. 특히 여성의 손길이 깊숙이 배어 있었다. 보통 제사는 남성의 역할로 여겨진다. 하지만 행담도는 달랐다. 남성들이 뱃일을 도맡아야 했기에, 남아 있는 여성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물론 제를 직접 지내는 일도 있었다.
물론 제사를 준비하는 데는 엄격한 금기도 있었다. 음식을 마련하는 집은 사흘 동안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됐고, 대문 앞에는 황토를 두어 나쁜 기운을 막았다. 월경 중인 여성은 제사 준비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피를 부정한 기운으로 여겼기 때문이란다.
제사의 풍경도 인상 깊다. 주민들은 소지에 이름과 소망을 적어 불에 태워 올렸다. ‘잘 다녀오게 해달라’, ‘만선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가 담긴 소지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면 신이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됐다. 반대로 바닥에 떨어지면 주민들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작은 재 한 조각에도 생명과 연관돼 있기에 기쁨과 슬픔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행담도 주민이었던 김종순 씨는 “소지가 잘 올라가면 안심했고, 떨어지면 안타까워했다”며 “당제가 있기 전 집에서 전 부치고 과일 준비한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매산리 주민들의 행담도 기억
행담도의 당산과 당제는 섬 주민만의 기억이 아니다. 섬과 맞닿아 있던 신평면 매산리 주민의 입에서도 그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 1932년 조우영 씨, 1940년생 마재훈 씨, 1946년 조상섭씨는 평생 매산리에 살아 온 이들이다. 그들은 바닷물이 빠지면 배를 타지 않고도 행담도를 건너갔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걸어갔다 돌아오는 정도의 소풍 같은 일이었다.
당산에도 올랐던 마 씨는 “당산의 끝이 낭떠러지였다”며 “물이 밀려올 때, 낭떠러지 아래를 보면 바다가 찰랑였고 물이 나갈 때는 모래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높이가 꽤 됐기에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조상섭 씨는 “당산에 오래된 나무가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난다”며 “행담도나 매산리 주민들은 대부분 뱃일했기 때문에, 바다에 나갈 때마다 위험을 안고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돛 하나와 바람에 의지할 뿐이었기에 주민들은 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행담도 주민들 역시 당산에 가서 제를 올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사라진 당산과 당제
주민들이 기억하는 마지막 당산제는 서해대교가 건설될 무렵,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던 무렵이었다. 이때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들이 찾아 공사가 잘되길 바란다며 당제를 지내기도 했단다. 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제물을 차리고 전과 과일, 술을 마련해 기도를 올렸다. 이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그리고 서해대교가 놓이고 행담도가 육지와 이어지자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당산제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당산 자리는 잡목과 돌무더기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당제를 올리며 바다의 안전과 마을의 안녕을 빌던 주민들의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한수미 기자, 안라미 P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