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화합을 상징하는 기지시줄다리기는 500년의 전통을 지닌 의식이다. 줄을 만들고 다리는 모든 과정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모여야 가능하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줄다리기에는 그런 이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총 6개의 이야기로 기지시줄다리기를 지켜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지면 보도와 영상으로 함께 기록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2025년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으로 취재·보도합니다.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기지시리를 넘어 당진은 거대한 줄로 하나가 된다. 500년 넘게 이어온 기지시줄다리기 축제가 막을 올리면, 마을은 흥겨운 풍물과 환호성으로 가득찬다. 하지만 그 화려한 시작 뒤에는 누구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엄숙한 의식이 있다. 바로 축제의 성공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주 담그기’다.

줄다리기축제에서 가장 먼저 행해지는 의례는 술을 빚는 일이다. 당제와 용왕제에서 신에게 올리는 이 술은 단순한 양조주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원을 담아낸 신성한 매개체다. ‘당주’는 줄다리기 축제를 여는 첫걸음이자, 기지시마을 공동체 정신을 지탱해 온 상징과도 같다. 이 술과 그리고 기지시줄다리기를 반평생 곁에서 함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병재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 이수자다.

쌀을 모아 담근 마을의 술

‘당주’는 오랜 세월 공동체의 정신을 담아온 술이다. 먹기 살기 힘들던 시절에도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 쌀을 모았다. 누군가는 한 됫박, 또 누군가는 반 됫박을 내놓으며 부족한 형편 속에서도 당주만큼은 꼭 빚어왔다. 그 속에는 가족의 건강도 담겨 있지만, 동시에 마을 전체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겼다.

당주는 무려 100일간의 발효와 숙성을 거쳐야만 한다. 먼저 술을 담을 항아리를 훈증 소독해 깨끗하게 만든다. 이어 찐밥에 누룩을 섞고 물을 부어 항아리에 넣은 뒤 발효를 시작한다. 한때는 방앗간에서 누룩을 사 와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효가 시작되면 항아리 주변에 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쪽으로 꼬아 만드는데, 이는 악운을 차단하고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전통적인 주술 행위다.

당주댁이 지켜야 할 금기

당주를 담그는 집, 이른바 ‘당주댁’ 선정 또한 중요하다. 과거에는 마을의 덕망있는 어른이 맡아 공동체의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은 그 의미가 옅어졌지만, 보존회는 여전히 신중하게 당주댁을 정한다. 당주댁이 된 집은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았다. 몸과 마음을 정결히 유지해야 했으며, 부정한 음식을 피하고 초상집을 방문하지 않는 등 여러 금기를 지켜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술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전통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당주

인생의 절반을 줄다리기와 함께 해 온 이가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보존회 김병재 이수자다. 그는 1993년 전수회관에서 농악을 배우다 줄다리기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6년 전수생으로 등록하면서 처음 당주 담그기를 경험했다.

“그때 처음으로 당주 담그기를 보았는데, 줄다리기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부터라는 걸 느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술을 빚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김 이수자에게 당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줄다리기와 마을 공동체의 뿌리를 잇는 상징이었다. 그는 당주를 담글 때마다 축제가 무사히 치러지고, 또 그 해에 풍년이 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아마 술을 담그고, 줄을 꼬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전승자들의 무거운 책임감

현재 줄다리기 전통을 이어 가려는 이수자와 전승자는 약 30여 명이다. 하지만 이들이 계속해 활동을 영위해 나갈 현실을 쉽지 않다. 젊은 세대의 참여가 적은 데다, 활동이 곧 바로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는 전업으로 삼을 수 없기에, 전통을 지키는 일에는 한계가 따른다.

김 이수자는 “옛날부터 내려온 것을 우리가 이어가고, 또 앞으로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다”며 “줄다리기에 참여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지 않으면 전통은 언젠가 끊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줄다리기를 활용한 공연과 교육, 전수관 건립과 같은 기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도 별도의 전수관조차 없어 전통 계승 활동에 제약받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

김 이수자가 가장 강조하는 가치는 ‘옛것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는 “줄다리기의 줄을 기계로 꼬면 되지 않냐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옛 방식을 이어왔기에 지금의 줄다리기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렇기에 줄다리기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줄다리기는 그의 인생 절반을 함께해 온 동반자였다. 전수관이 생겼을 때 느낀 기쁨, 그리고 줄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속상함 모두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는 “줄다리기와 함께 한 세월이 반평생”이라며 “옛것을 이어간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해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통을 잇는 사람들

기지시줄다리기 당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공동체가 함께 빚어낸 역사이자,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신성한 매개체다. 그 전통의 한 가운데에는 김병재 이수자처럼 묵묵히 책임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전통을 이어 나갈 사람이 많지 않다”는 그의 말처럼, 당주와 줄다리기의 미래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책임과 헌신, 그리고 마을 공동체의 기억이 살아 있다면 500년 역사의 줄다리기는 계속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