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웅 전 석문중학교 교장
신양웅 전 석문중학교 교장

석문면 교로리 석문각에서 북서쪽으로 약 9㎞ 떨어진 소난지도. 한때 이 섬 끝 둠바벌 해변에는 덩그러니 방치된 무덤 하나가 있었다. 파도에 떠밀려 온 뼈들을 급히 묻어 놓은 탓에 봉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일부 주민들은 피부병인 연주창(부스럼병)에 사람 뼈가 약이 된다는 속설을 믿고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훼손돼 가던 무덤은 어떻게 오늘날 기억하는 ‘소난지도 의병총’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과 집념 어린 헌신이 숨어 있다.

그 중심에는 석문중학교에서 역사 교사와 교장을 지내며 55년간 교육 현장에 몸담았던 신양웅 선생도 있다. 그는 화려한 주목이나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소난지도 의병항쟁을 비롯한 향토사 연구에 매달렸다. 아내에게 “밥이 생기냐, 떡이 생기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전국을 누비며 자료를 찾고 지역의 역사를 기록했다.

소난지도에 모인 의병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국권을 빼앗긴 이후 전국 곳곳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경기도 수원 일대에서 활동하던 홍원식 의병부대 역시 일제에 맞서 항쟁을 이어갔지만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충남 지역까지 내려오게 됐다. 신양웅 선생은 “소난지도는 남쪽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세곡선이 쉬어가는 길목으로 식량 확보가 수월했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신분을 숨기기에도 유리했다”며 “의병들이 소난지도에 집결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항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주경찰서 분서를 통해 의병들의 동향을 파악한 일본군은 소난지도를 기습 공격했다. 의병들은 9시간 동안 치열하게 맞섰지만 결국 수많은 희생을 남긴 채 전투는 막을 내렸다. 신양웅 선생은 “시신 일부는 바다에 떠내려가고 일부는 그물에 걸려 발견됐으며, 남은 시신들은 주민들이 수습해 둠바벌 해변에 매장했다”며 “그곳이 바로 소난지도 의병무덤”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록에는 의병 사망 41명, 부상 9명, 바다에 투신한 의병 50여 명으로 남아 있지만 실제 희생 규모는 100명인지 그 이상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마을주민도 복원에 동참

소난지도 의병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주민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구전됐지만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역사 속에서는 점차 잊혀 갔다. 그러던 중 신양웅 선생의 부친이자 석문중학교 설립자인 신이균 초대 이사장이 의병무덤의 존재를 알게 됐다. 신양웅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부친이 고향으로 돌아와 소난지도에서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며 “그 과정에서 의병항쟁과 의병무덤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1970년 신이균 이사장이 당시 김부영 교장과 함께 소난지도를 방문했을 때 의병무덤을 직접 확인했다. 신양웅 선생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무덤이 방치된 현실을 보고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참상을 목격하고 온 신이균 이사장은 마침 충남도교육청의 ‘내 고장 전통 가꾸기’ 사업 공문을 접했고 석문중학교 교직원과 함께 의병무덤 복원에 나섰다.

특히 당시 역사 교사였던 신양웅 선생을 중심으로 문헌조사와 주민 증언 수집을 시작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응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단다. 신양웅 선생은 “의병항쟁이 일어날 당시 소난지도는 120여 가구가 살던 가난한 섬마을이었다”며 “의병들이 머무르며 식량과 숙소를 요구했던 탓에 일부 주민들에게는 긍정적인 존재만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부 주민들은 “도둑놈들 무덤을 뭐 하러 건드리냐”며 복원 작업에 반대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신이균 이사장과 주민 최을용 씨의 오랜 인연이 복원 사업의 전환점이 됐다. 최을용 씨가 주민들을 설득하고 석문중학교 학부모들까지 힘을 보태면서 마을 주민도 복원 작업에 동참하게 됐다.

교직원과 학생이 세운 의병비

또한 신양웅 선생은 당시 교무회의에서 의병들을 기릴 봉분과 비석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에 석문중학교 교직원과 소난지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의병 봉분을 조성하고 비석 건립을 추진했다.

1980년 의병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석문중학교 학생과 교직원들의 성금 모금으로 건립 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배편과 도로 사정이 열악했던 당시, 비석을 소난지도까지 옮기는 과정은 특히 쉽지 않았다. 신양웅 선생은 “당시 석문 지역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여서 비석 운반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비석을 섬에 세울 것이라고 하니 제작업자는 그 가격을 배로 불렀다”고 회상했다. 이어 “운반도 어렵다고 해 교직원들이 비석을 가마니로 감싸 트럭에 실은 뒤 배에 옮겨 실어 소난지도 앞바다까지 운반했다”며 “소난지도 앞바다에 비석을 바닷물에 던져 물에서 건져 올린 뒤 교사들이 목도를 어깨에 메고 의병무덤까지 직접 옮겼다”고 말했다. 또한 “비석을 세울 때는 시멘트를 갤 물이 없어 1km가량 떨어진 민가에서 물을 길어 날랐다”며 “교직원들의 고생이 정말 많았다”고 덧붙였다.

숱한 노력 끝에 국가등록문화유산 등록

신양웅 선생과 기념사업회는 의병총을 세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의병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 발굴에 나섰다. 2002년 당진군에 연구 지원을 요청했으나 학술적 고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신양웅 선생은 향토사 연구에 뜻이 맞았던 박상건 전 석문초 교장을 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영입해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박상건 전 교장이 한국독립운동자료에서 1908년 소난지도 전투 상황이 기록된 자료를 발견하면서 연구가 본격화됐다. 신양웅 선생은 “이를 근거로 연구비를 지원받아 충남대학교 김상기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했다”며 “2003년 충남대학교 학술대회를 통해 소난지도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러한 숱한 노력 끝에 소난지도 의병총은 2009년 현충시설로 지정됐으며, 2024년에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또 현재는 소난지도 의병항쟁 기념사업회가 매년 6월 1일 의병의 날 추모행사를 열며 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신양웅 선생은 “유적이 무덤 형태를 갖추고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다만 의병들을 기리는 사당 건립 계획이 설계까지 마쳤음에도 군수나 시장이 바뀜에 따라 추진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전했다.

>> 신양웅 선생은

- 1940년 석문면 장고항리 출생

- 삼봉초, 당진중, 당진정보고 졸업

- 충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 전 석문중학교 역사 교사·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