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3세 블라디미르 씨
고려인 3세 블라디미르 씨

<편집자주>

당진 남부권역(합덕읍·우강면) 일대에는 가족 단위 고려인 이주가 증가하며 이른바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학교 현장의 다문화 학생 비율이 빠르게 늘어나는 등 노동·교육·복지·주거 전반에서 지역사회의 구조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고려인은 여전히 낯선 존재이거나 갈등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에 본지는 고려인을 ‘문제’가 아닌 ‘이웃’이자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위해 대한고려인협회 당진지부, 세한대학교 웹툰애니메이션학과와 협력해 웹툰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곁의 고려인 이야기를 총 6회에 걸쳐 연재하며,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당진방송 관련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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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3세 블라디미르 리씨는 어린시절 아버지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63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을 꿈꿨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그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안정적인 직장과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자녀와 손주들에게 ‘진정한 고향’을 찾아주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마침내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제 합덕읍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동섭 씨가 일본의 추적을 피해 크루즈선에 탑승했다.(세한대 웹툰애니메이션학과 안예은 학생 작품)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동섭 씨가 일본의 추적을 피해 크루즈선에 탑승했다.(세한대 웹툰애니메이션학과 안예은 학생 작품)

독립운동가 이동섭 씨의 후손블라디미르 리 씨는 태안 이씨로, 독립운동가 이동섭 씨의 후손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동섭 씨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일본의 추적을 피해 한국을 떠났다.

이동섭 씨는 한국과 러시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향하는 크루즈선에 탑승했지만 일본 입항 시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첫 기착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내려야 했다. 블라디미르 씨는 “일본에 입항하면 증조할아버지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를 알게 된 동포들이 소식을 전해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며 “그렇게 우리 조상은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에 정착하게 됐다”고 말했다.젊은 시절 블라디미르 씨는 해군으로 복무했다.

젊은 시절 블라디미르 씨는 해군으로 복무했다.
젊은 시절 블라디미르 씨는 해군으로 복무했다.

기계·자동화 설비 전공

블라디미르 씨는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나 공과대학교에 진학해 기계 및 자동화 설비를 전공했다. 이후 청년 시절 구소련 해군에 입대해 발트해와 바렌츠해에서 2년간 의무 복무를 마쳤다. 그는 “소비에트연방 시절에는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해야 했다”며 “제대 후에는 공장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고, 그가 다니던 공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그는 다시 군에 입대했다. 블라디미르 씨는 “학력과 건강 상태 등 모든 조건이 군 복무 기준에 적합했다”며 “다시 군인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중령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그는 전공을 살려 대학교와 여러 정부 부처에서 근무했다. 특히 러시아의 가스 기업인 가스프롬에서 산업안전 수석전문가로 일했으며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도 건축 관련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아버지 통해 알게 된 ‘코레야’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늘 한국행을 꿈꿨다. 그의 아버지 이민호 씨는 블라디미르 씨가 세 살 무렵부터 조상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단다. 블라디미르 씨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자주 말씀해주셨다”며 “‘코레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우리의 조국이라고 설명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곳은 집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치거나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나라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 가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고 덧붙였다.

‘진정한 고향’ 찾아주기 위해

그는 1990년대에도 한국 방문을 시도했지만 현실적인 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씨는 “당시 동포단체 대표를 통해 한국 방문을 추진했고 여러 차례 회의도 열렸지만, 복잡한 정치·외교적 이유로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63년을 기다린 끝에 그는 지난해 11월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안정적이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는 고향의 전 재산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아닌 가족이었다. 그는 “자녀와 손주들에게 더 나은 삶과 진정한 고향을 찾아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현재 그는 한국에서 자녀와 손주와 함께 살고 있다.
현재 그는 한국에서 자녀와 손주와 함께 살고 있다.

친척들이 자리 잡은 합덕으로

블라디미르 씨는 친척들이 먼저 정착해 있던 합덕읍에서 아들 부부와 딸, 손주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생활하고 있다. 현재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 일하고 있으며, 그는 경력을 살려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리 씨는 “컴퓨터를 통해 CIS 국가들의 프로젝트를 맡아 원격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다”며 “주로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손주들을 돌보는 등 집안일도 적극적으로 맡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생활에 대해서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답하며 깊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다만 “유일하게 한국어 공부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이 땅의 거리를 걸을 때마다 “마침내 내 집에 왔다”는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는 우리 고려인들도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싶다”며 “우리 손주들이 이곳에 온전히 뿌리내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