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남 율리아 학생
신평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남 율리아 학생

<편집자주>

당진 남부권역(합덕읍·우강면) 일대에는 가족 단위 고려인 이주가 증가하며 이른바 ‘고려인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학교 현장의 다문화 학생 비율이 빠르게 늘어나는 등 노동·교육·복지·주거 전반에서 지역사회의 구조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고려인은 여전히 낯선 존재이거나 갈등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에 본지는 고려인을 ‘문제’가 아닌 ‘이웃’이자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위해 대한고려인협회 당진지부, 세한대학교 웹툰애니메이션학과와 협력해 웹툰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곁의 고려인 이야기를 총 6회에 걸쳐 연재하며, 기사 내용은 유튜브 채널 ‘당진방송’을 통해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당진방송 관련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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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과 관공서, 마트에서 어머니의 통역을 맡던 경험은 고려인 4세 남 율리아 학생에게 통번역가라는 새로운 꿈을 안겨줬다. 한국어를 배우며 도움을 받던 학생이 이제는 주말마다 고려인 주민들의 한국어 교육을 돕는 봉사자로 성장했다.

11살의 율리아, 낯선 초등학교 교실 문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11살의 율리아, 낯선 초등학교 교실 문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주변의 한국 친구들이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주변의 한국 친구들이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기쁨”

고려인 4세 남 율리아 학생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자랐다. 2018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으며, 2년 전 먼저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아버지를 따라 합덕에 정착했다. 카자흐스탄에 친구들을 두고 떠나야 했지만 아쉬움보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율리아 학생은 “아빠와 함께 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학기부터 합덕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같은 반에서 외국인 학생은 율리아 학생이 유일했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친구들과 소통하기 어려웠지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율리아 학생은 “친구들이 정말 착하고 친절했다”며 “먼저 다가와 함께 놀아주고 한국어도 알려줘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싶었던 그는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초기에는 정규수업 대신 학교의 한국어 교실에서 1대1로 한국어를 배우며 언어를 익혀 나갔다.

“잘 할 수 있는 언어에 집중”

하지만 한국어 교육에 집중한 만큼 다른 교과 학습은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어 수업에 할애하면서 수학과 과학 등 기초 교과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고, 합덕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언어의 장벽과 높아진 학업 수준이라는 두 가지 어려움을 동시에 마주해야 했다. 기초 학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중학교 과정을 한국어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율리아 학생은 “처음부터 다시 배우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며 “중학교 때는 ‘한국어만 배우면 된다’는 생각이 강해 수학이나 사회 같은 과목은 거의 포기했다”고 말했다.

대신 율리아 학생은 모든 과목을 억지로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국어를 잘 알지 못하는 어머니 대신 율리아 학생이 포장지에 적혀있는 한국어를 설명해 준다.
한국어를 잘 알지 못하는 어머니 대신 율리아 학생이 포장지에 적혀있는 한국어를 설명해 준다.

엄마의 통역사로

한국어에 익숙해질수록 그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통역사 역할을 맡게 됐다. 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한국어를 배울 시간이 부족해 병원이나 관공서, 마트 등을 이용할 때 어려움을 겪곤 했다. 그때마다 율리아 학생이 함께 다니며 통역을 맡았다. 율리아 학생은 “엄마를 도우려고 같이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직업으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어른 고려인을 대상으로 율리아 학생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말이면 어른 고려인을 대상으로 율리아 학생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돕는 차례

합덕 도담도담지역아동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며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은 경험도 꿈을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율리아 학생은 “엄마를 도우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당진시가족센터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더이상 센터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직접 도담도담지역아동센터를 찾아가 한국어를 배우는 고려인 주민들의 통역 봉사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과거 한국어를 배우며 인연을 맺은 김학로 씨는 주말마다 운영되는 ‘고려인 주민 한국문화로 배우는 실용 한국어’ 수업에서 봉사활동을 제안했고, 율리아 학생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현재까지 한국어 교육 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김학로 씨는 “율리아 학생을 처음 만난 것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며 “그 나이 또래 학생들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율리아 학생은 누구보다 잘 한국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고 말했다. 이어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만날 일이 없었는데 먼저 찾아와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이 정말 기특했다”고 덧붙였다.

남율리아 학생은 번역가가 꿈이다. (세한대 웹툰애니메 이션학과 이지현 학생의 작품)
남율리아 학생은 번역가가 꿈이다. (세한대 웹툰애니메 이션학과 이지현 학생의 작품)

“세계를 누비는 통번역가가 되고 싶어요”

현재 신평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남 율리아 학생은 대학 통번역학과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는 물론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공부했고, 현재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어에도 관심을 가지며 다양한 언어를 익히고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통번역 분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가이드로 활동하고 싶다는 꿈도 품고 있다. 어린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며 두 나라의 문화 차이를 직접 경험한 것이 다양한 나라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율리아 학생은 “한국과 카자흐스탄의 문화 차이를 겪으면서 다른 나라들은 또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며 “대학 졸업 후에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통역과 가이드 활동을 하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