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꽂이에 빽빽히 꽂힌 책들이 있는 도서실을 무척 좋아한다. 우리학교 도서실에는 고전, 경제, 소설, 시사등 어려운 책들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나는 그 책들을 바라볼 때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언젠가는 저 책들을 읽을 수 있겠지!’하고 쉬운 책들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던 중 나는 ‘문학’이란 표찰을 단 서가에서 상록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 책은 꽤 낡아 보이면서도 제법 두꺼운 부피였다. 이 책을 내가 과연 모두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서 나는 어느새 첫장을 넘겼다.
내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박동혁과 채영신이었다. 그들은 각각 청석골과 한곡리에 자리를 잡고 가난한 농촌사람들에게 협동과 친목을 도모하도록 계몽활동을 폈고,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또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만들어 유익한 토론회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의문이 생겼다. 계몽활동을 동혁과 영신, 둘의 힘만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모든 일을 두사람이 계획하고 농민들은 이런 계획에 따라가기만 하는 모습에서는 결코 농민들의 자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자신의 자각없이 어떤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는가? 아마 동혁마저 죽었다면 농민들은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두 주인공 없이 농민들 스스로는 아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록수를 읽으며 감동에 떨게 했던 부분은 여러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큰 감동으로 이끈 부분은 영신이 청석골에서 자리를 잡고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장면이었다. 얼마 모일 수 없는 예배당이었지만 최대한의 어린이를 가르치려던 영신의 노력에 예배당이 위험하다고 하여 주재소의 순사는 80명만을 가르치라고 명을 내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영신의 마음은 아마 화살이 가슴에 박히는 고통보다 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십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의 내게도 그 사건은 가슴을 치게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상록수’라는 소설이 이 시대에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일제치하에서는 농민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모진 학대를 받았고 가난했으며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것이 글이었으리라. 그래서 지은이는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영신의 노력 속에서 지은이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용기와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신은 농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굳은 결심을 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산을 넘고 논길을 헤매며 기부금을 열심히 모아 학원을 짓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그녀는 원하던 학원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학원 낙성식날 영신이 쓰러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지은이가 주려고 했던 힘과 용기를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을 통해서라도 자기민족을 일으키려했던 그 간절한 소망을.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이 자신의 사랑보다 강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리라 믿는다.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영신은 농촌의 농민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 목숨을 바쳤다. 천사보다도 더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농민을 돌보던 영신과 농촌부흥에 힘쓴 동혁, 이들의 노력은 곧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그런 사랑.
비록 영신은 죽었지만 다시 시작하려는 기상 나팔소리가 힘차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청석골과 한곡리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희망으로 힘차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그 책에 뿌리를 내리고 늘 푸르게 자라나는 한그루의 상록수를 뚜렷하게 보았다.
어떤 역경과 고난에서도 늘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나무, 이 나무가 과연 참다운 나무 상록수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