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소금산 같은 삶의 토막에서
(달아, 네게로 가고 싶어. 바, 바람아 나를 데려가 줘. 눈물아, 눈 속에 고여있지마. 아, 아프잖아. 비구름처럼 뿌리고 싶어. 눈을 감아 주겠니, 꽃들아. 쉿, 노래부르지마, 춤도 추지마. 그림자까지 챙겨가고 싶어. 세상에 남겼던, 본래의 내가 아니었던 해괴한 허상들까지 거두어 갈테니. 묵은 흔적 하나 남김없이.) 성당사(聖堂寺) 마당 한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은행나무 밑에서 내 맘은 그렇게 채근하고 있었나보다. 가끔씩은 삶이 가시밭 같을 때가 있다. 소금산 같을 때가 있다. 성당사를 찾아갔던 그날 즈음이 그랬다.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고 싶으나 막상 용기가 없어 눈시린 햇살 뒤로 씁쓸함이 물리곤 했던 나날들.
고요함 속에서 만난 수종 스님
고대면 진관리 2구 산자락 사이에 자리한 작은 절, 성당사의 마당엔 풍성한 햇살만 넘쳐흘렀지, 뭐가 그리운지 이따금씩 뻐꾸기 울음소리만 아스라하게 들려왔지, 청설모 한 마리가 절지기인 듯 마당가를 어슬렁거리고만 있었지,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가 귀를 간질일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홀로 성당사를 지키고 계신 수종(修宗) 주지 스님을 그 고요함 속에서 만났다.
마침 먼 곳 부천에서 찾아온 지용필 부부 내외가 공양을 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객을 맞은 수종 스님의 얼굴엔 맑은 미소가 넘쳐흘렀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언젠가 밤늦게 성당사를 찾아왔다는 지용필 부부는 그 후로 스님의 몇 안 되는 손님이 되고 있다. 처음 성당사를 찾았던 그날 밤, 그들은 지친 자신들에게 불상이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고 한다. “이 밤중에 왜 왔누?” 그들이 맘속으로 “물어물어 그저 찾아왔습니다” 답했다고 한다. “먼 길 오느라고 애썼다. 쉬다 가거라.” 불상의 그 말에 울컥 눈물이 솟더라던 그들.
스님 앞에 조심스럽게 앉은 내 맘도 그들과 같았을까. 스님은 분명 여든 일곱이나 되신 노인임에 틀림없지만 어린아이처럼 맑았고 허공인 듯 텅 비어있었으나 충만했다. 스님의 지긋한 눈빛에 흐르는 경건하고 생동하는 어떤 기류가 채근하는 내 맘을 다소곳하게 가라앉히는 듯 했다.
‘금시 짜낸 쇠젓은 상하지 않듯
재에 덮인 불씨는 그대로 있듯‘
“어린 마음에 이만치 컷을 때 세상사는 게 비겁했어요. 그렇게 사는 게 아닌데 사람들이 비겁하게 살더라구요. 인간 대 인간, 사람 대 사람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해줘야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속리산 법주사에 열 일곱의 나이로 들어갔죠.” 귀한 집 첫째 딸이었던 스님은 그렇게 출가를 결심했다. 그러나 스님이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좀처럼 다른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8년 동안 행자생활을 하셨던 스님은 끝내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젊었을 땐 너무 억셌어요. 조금만 유했더라도 좀더 일찍 중이 될 수 있었는데 그걸 견딜 수가 없어지요. 이렇게 늙었는데도 놋그릇이 번들번들한데 젊었을 땐 어쨌겄어요.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아니 산다는 말처럼 다른 중들이 나를 견디질 못했어요. 그래서 숱헌 고생했죠. 어느날 하도 분이 나서 법주사 대문을 계란으로 온통 더럽혀놨죠. 중이면 뭐여! 부처면 뭐여! 사람답게 사는 게 사람이지,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결국엔 쫓겨났는데 내 맘부터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죠. 모두 다 내 탓이었으니까요.” 모든 허물은 자기 안에서 비롯됐다는 깨달음을 안고 하직한 스님은 수덕사의 마벽초 스님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속세에선 살 수 없었으므로,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닌 비겁함에 물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열 번도 더 찾아갔으나 수덕사에서도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다. 수덕사를 떠날 양으로 마지막으로 찾아간 어느날 드디어 마벽초 스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대본산 주지 감이다. 왜 중을 안 만들어. 머리 깎아라.” 스님의 고운 머리카락은 속세의 인연이 끊어지듯 그렇게 스님의 발치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금시 짜낸 쇠젓은 상하지 않듯, 재에 덮인 불씨는 그대로 있듯,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어느 불경처럼 스님은 끝내 중이 되어 인간답게 사는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 일곱에 출가해 스님의 나이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때였다.
“그런디 머리만 깎는다고 중이 아녀요. 자기 자신을 깨우쳐야 중이지. 시방 중들이 중 같이 처신을 못혀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귀한 시주로 옷덜 잘 차려입고, 차 끌고 댕기고 그게 어디 중이여요. 자신을 닦아야죠. ‘일체가 제불이라(자기 자신이 곧 부처와 같다)’ 그 말이 다른 뜻이 아녀요. 자기를 닦으라는 뜻이지.”
수행으로 어두운 곳의 등불이 되어
스님의 수행은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하나둘 고아들을 거두어 그들의 상처 입은 마음에 등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육군의 장교이거나,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장학사이거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가 된 스님의 슬하에서 자라난 20여명의 아이들. 특이하게도 그들 중 그 누구도 머리를 깎지 않았다. 스님은 속세에서 거둔 그들 모두를 다시 속세로 돌려보냈다. 우시장에서 거간으로 이문을 남기기도 하고 거적때기로 승복을 기우면서 악착같이 교육시켰던 것도 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입산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스님이 성당사에 오신 것은 1987년 여름이다. 일흔 둘 되던 해였지만 스님은 그 여름 무너져 가는 성당사를 말끔히 고치셨다. 자연히 신도들이 늘어갔고 쇠퇴했던 성당사는 부흥했다. 그러나 스님이 기력을 잃어가면서 조금씩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다. 이젠 스님의 대나무처럼 곧은 마음과 깨끗하고 순수한 심성을 기억하는 몇몇 이들만 속세의 때를 씻기 위해 스님을 찾을 뿐이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안타까워 외롭지 않으세요? 하고 문득 물었으나 스님은 선문답으로 갈음하셨다. 외롭지, 그러나 외로움을 느끼면 뭐 하겄어요, 하고는 허허허 웃으셨다. 그 순간 슬쩍 스님의 손을 잠깐 잡아봤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불씨, 스님의 따뜻한 체온은 내 어두운 맘을 일시에 밝히며 장작불처럼 타 올랐다. 어쩌면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도 더 외로운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맘을 이렇듯 스님의 손길이 어루만져준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동했다.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말고...
시간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스님이 아쉬움을 숨기지 않으며 다음에 또 오세요, 이 다음엔 밥해줄테니, 하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셨을까? 외려 나의 발길이 더 떨어지지 않았던 것을. 밥해준다는 스님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성당사를 다시 찾을 것만 같다. 고요함 속에서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어지러운 상념들을 지우고 내 안의 어둠을 벗어버리기 위해. 인사를 주고받는데 스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씀 거드셨다. “내가 한 얘기 잘 생각해봐요. 그 속에 뭐가 있어도 있을 테니” 스님이 들려주신 말씀 중에 또렷이 기억에 남는 한 구절을 옮겨본다. 뭐가 있어도 있는지, 그건 읽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남에게 속지도 말고 남을 속이지도 말라.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말고 안락하기만 하여라」
이희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