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매당 이첨 선생 기념행사 및 학술대회가 지난 15일 군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민종기 군수와 김천환 군의회 의장 등 내빈과 신평 이씨 종친회원 등 200여명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을 주관한 쌍매당 이첨 선생 기념사업회의 장의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첨 선생의 정신과 학문을 발전시켜 당진의 자랑할만한 문화인물로 발전시키자”고 말했다.

한편 기념식에 이어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장의환 기념사업회장, 이종목 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화여대 유경아 교수,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구복 원장이 각각 분야를 나눠 강연을 진행했다.

고려말, 조선초를 거치며 일곱 임금을 모셨고 조선초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첨 선생은 지난 2003년 10월 이첨 선생 기념사업회 등의 노력으로 문학부분 이달(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김기연 기자 kykim@djtimes.co,kr

[강연정리]

쌍매당 이첨 선생의 생애

-  장의환 쌍매당 이첨선생 기념사업회장

이첨 선생의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권신의 횡포 속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충목왕 1년(1345) 신평현 신북면 오사리(현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서 태어났다. 이첨의 자는 중숙(中叔) 또는 소숙(少叔)이며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이첨은 영특하고 총명해 아버지 이희상으로부터 한문을 배워 익혔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며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이첨 선생은 13세 때 풍질로 아버지를 여의고 19세 때 어머니마저 잃자 출가한 누이의 집에서 잠시 지내다 당시 명문사학이던 구재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24세 되던 공민왕 17년(1368) 공민왕이 직접 시험을 치러 뽑은 일곱명 중 장원급제를 차지해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공민왕을 도와 공직생활을 하던 이첨 선생은 공민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간언을 하다 수차례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고려의 마지막 신하로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이첨 선생은 곤장과 함께 유배당했다.

태조 3년(1394) 유배에서 풀려난 이첨 선생은 초계현령(경남 합천군 초계면)으로 내려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유학연구에 몰두했다. 이첨 선생은 54세가 되던 태조 7년(1398) 태조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다시 공직으로 돌아온다. 이첨 선생은 정종와 태종을 모시며 학문에 정진했고 태종 5년(14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쌍매당 이첨 선생의 시세계

-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태종실록, 동인시화 등에 실린 이첨 선생에 대한 평은 매우 뛰어나다. 각종 문헌에 나타나는 이첨 선생의 시는 당대 최고로 꼽히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 많은 시 중 일부분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분만 보더라도 그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한시는 고려 중기에 송대의 시인 소식을 중심으로 한 송시풍이 주도적인 흐름을 장식했다. 송시풍은 조선초기 유행하다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당나라 시풍이 시단을 휩쓸게 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쌍매당은 송풍이 시단을 전반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롭게 당풍을 구가했다. 이 당시 이첨 선생이 고수한 당시품 경향은 16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당풍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첨 선생이 추구한 당풍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정치의 이해득실을 논하고 백성의 생활상을 반영하며, 우국이 주제인 경우가 많다.

이첨 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엄정한 역사 의식을 견지하고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했으며, 맑으면서 고운 시를 후세에게 선물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시가 유실돼 그의 모든 역량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문집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온 세상을 울리면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