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미 밤이 찾아 온 지가 오랩니다. 고달픈 몸으로 자리에 누운 나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에 마음도 함께 떨어집니다. 비가 많이 쏟아져 내리면 마음도 요란스럽게 빨리 떨어져 내립니다. 비가 잦아들면 천천히 여유롭게 마음도 떨어집니다.

매일 매일을 준비하면서 하늘나라를 바라는 순례의 길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서 찾아낼 때마다 그것은 기쁨이고 그리움이고 보고픔 입니다.

몸은 마음 같지 못해서 여행을 나서려면 준비도 복잡하고 차림도 번거롭습니다.

그래서 번잡스럽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비가 온다고 한들 걱정이 안 되는 여행이라서 부담은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여행을 왜 그렇게 미루고 못 떠났는지를 나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살이에서 남아있던 자잘한 미련들이 아직도 짐이 되었는가 봅니다.

오늘은 미루던 마음을 추슬러 옛날 학창시절에 살던 신길동 192-22번지의 일본식 관사였던 집마당에서 언제나처럼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집안으로 외쳐대고는 뛰어나왔습니다.

그런 나는 쌍백선(雙白線)이 쳐진 교모에 교복을 입은 학창 시절의 모습이 됩니다.

눈을 감으면 그리움이 보입니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만납니다. 눈을 감으면 먼저 세상을 떠난 보고 싶은 이들을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이들도 모두 만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를 아버지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고 신기롭게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도 지난 어린 시절이 있어서 그립다는 것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에서의 만남인데도 그 마음이 설레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에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들 옛날의 모습입니다. 하나도 안 변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줍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아름다운 추억의 모습으로만 있습니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하여도 이번 여행에서는 별 의미는 없습니다만 지금은 없지만 눈만 감으면 변하지 않은 모양 그대로이면서도 마음대로 탈 수 있는 전차를 택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가방을 어깨에 메고 영등포 구청이 있던 옛날 구청 앞 정거장으로 나왔습니다. 영등포 역이 종점인지라 전차가 오는 것이 빤히 보입니다. 전차 안에서 나는 또 많은 사람들과 만납니다. 이 마음의 전차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탄다 한들 만원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전차 안에서 벌어진 일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저 그리움이 순서일 뿐입니다. 인연을 이어보지 못한 사람도 생각이 나면 만나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또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날만 만날 수 있으니까요. 마음의 전차는 움직이는데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가로수도 사람들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전차에 탄 사람이나 거리를 걷는 사람이나 모두 다 아는 이들 뿐입니다.

눈을 감으면 그리움이 보이고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세상에 있습니다. 먼저 가 있는 그리운 모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한 달이 스무달로 늘었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남았을까?

※학부에서는 수의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체외 수정을 연구했다. 일본 북해도 낙농학원대학에서 전자 현미경으로 생식세포의 단계별 변화를 연구했다. 당진에서 동물병원을 개설 운영하였고 당진축협배합사료공장장을 맡기도 했다. 국내 유전자변형연구에 참여했고 국립공주문화대학 애완동물과와 공주대학 특수동물학과에서 십 년 넘게 강의를 했다.

말기 폐암으로 1개월의 생존을 선고 받고 하루 하루를 이어 가는 시한 부 삶을 살고 있다. 30년을 넘게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학래산방(鶴來山房) 에서 살다가 지금은 경기 안양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여기에 싣는 글들은 투병생활 중 그가 틈틈이 써온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