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은 자기들도 범선과 여행에 필요한 물품과 인원만 준비해 준다면 가능한 일로 별로 새로운 발견은 아니라면서 그의 공로를 깎아 내렸습니다. 바다로 배를 타고 앞으로만 갔다가 되돌아오는 항해라면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콜롬부스는 자기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공회당으로 불러모으고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달걀을 세울 수 있는가”였습니다. 아무도 세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콜롬부스는 천천히 앞으로 나와서 달걀을 집어 탁자에 부딪쳐 귀퉁이를 깨뜨린 다음 탁자 위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깨뜨려서 세우는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성 사이에 자리잡고 기록도 없이 내려오는 전통적인 풍습을 민속 문화라고 합니다. 우리의 민속문화는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면서 소실되어 버리고 또한 조국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그나마 유지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을 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동네 어귀에 있던 장승이나 서낭당은 이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예부터 전해오던 것은 더 더욱 남은 것이 없습니다.

기지시줄다리기가 체계를 잡아서 기록으로 남기 시작한 것이 이제 30년이 넘었습니다. 그것을 준비하여 지금의 형태로 이끌어 오기까지 주축이 되어 노력하신 분은 이우영 선생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 할 수는 없습니다.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은 내세울 수 없지만 마음 가득했던 열정과 고향사랑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생애를 고향에서 보내면서 사업에서 얻은 수익의 상당 부분을 고향으로 환원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선의도 많이 베푼 것은 모두가 아는 일 입니다.

기지시줄다리기가 충청남도 민속자료 35호로 공식 등록된 것은 1973년 12월26일입니다. 물론 주위의 뜻있는 분들의 공로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폄하하여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앞장서서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이 겪는 것보다 더 큰 경제적 부담과 심적 고통을 받게 됩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1979년 7월3일, 충청남도 지방 민속자료 제32호로 등록되고 1982년 6월1일, 긴 시간 동안의 준비 끝에 마침내 중요 무형 문화재 35호로 지정을 받습니다.

이때부터의 갈등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18년간, 이우영 선생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시련을 겪으셔야만 했고, 지역적으로는 분열과 갈등의 시기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리자고 든다면 또 다시 쟁론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쟁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로와 공헌에 대한 칭찬과 감사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누구인가 관심만 가졌더라도 유지될 수 있었던 많은 지역의 당제, 서낭제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 조차 남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접하던 모든 민속, 민화들이 전설 속으로만 남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잊혀져 가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기지시 줄다리기 또한 관심없이 버려져 있었다면 얼마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 지 모릅니다. 그것을 앞장서서 보존하려고 노력하신 이우영 선생이 있었기에 기지시 줄다리기는 잊혀지지 않고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러한 추모의 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물론 일이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도 찬사를 보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을 뽑아서 비판하겠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비판의 화살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우영 선생에게는 심적으로도 포기하고 싶은 시절의 시련기가 있었다는 것도 압니다. 물론 경제적인 희생은 더더욱 컸습니다. 나는 바로 그런 점에서 이우영 선생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인간적인 욕심이 있어서 그렇게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명예 때문이라고 비평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에서 초월하여 그분의 공로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우영 선생에게 명예로운 이름을 헌정하여야 할 때입니다. 또한 구체적인 기념물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