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차를 마십니다. 그렇다고 단지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서 차를 마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차에는 단순히 목마름을 해결한다는 생리적 효능 말고도 보다 높은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담겨 있습니다. 차는 분명 함께 나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이해하고 두꺼운 교분을 유지하며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공경하고 정으로 이어주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차는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 마시는 것만도 아닙니다. 혼자서 고요함을 즐기려는 명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동무가 되어 줍니다.

茶'를 풀어 쓰면 초두(艸)아래 사람 인(人)을 넣어 그 중심이 되고 그 아래 나무 목(木)을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의 어린 싹을 사람이 손질을 하여 마시는 것이 차라는 의미입니다. 차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보다 먼저 쓰여졌다는 <가야국기(伽倻國記)>에 금관가야 왕비로 시집온 불교국 아유타국 공주가 차씨와 차를 가져와서 심은 곳이 지금의 김해지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남 하동의 차 시배지(始培地)는 삼국사기에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의 사신으로 간 대렴(大廉)이 차와 차씨를 가지고 와서 그곳에 심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2천년 가까운 차 문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세계최고의 향(香), 색(色), 미(味)를 지닌 덖음차가 우리조상들이 개발한 차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차는 기후와 풍토 그리고 기호에 따라서 마시는 풍습과 정서와 만드는 방법이 다릅니다.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서 완전 발효차, 반 발효차, 덖음차, 찐 차 등으로 나누며 여러가지 방법을 혼합하여 만드는 차도 있습니다. 또 만들어두었다가 다시 가공하여 마시는 차도 있는데, 이런 가공 차에는 덩이차, 떡차, 가루차가 있습니다. 가루차 중에서도 차 가루를 바로 따뜻한 물에 풀어 마시는 말차(抹茶)가 있고, 티백에 넣어 물에 넣고 흔들어 마시는 홍차나 녹차도 있습니다.

완전 발효차를 만드는 방법은 채취한 찻잎을 그릇에 잔뜩 담아 두었다가 찻잎의 발효가 무르익고 발효열이 식은 다음에 차로 이용합니다. 발효차로는 홍차가 대표적이고 중국에는 보이차가 있습니다. 반 발효차는 반만 발효시키고 털어 말린 다음에 불에다 구운 차를 말하는데 중국의 오룡차(烏龍茶)와 철관음, 무이암차, 만리향차 등이 있습니다. 덖음차와 찐 차는 찻잎을 딴 즉시 찻잎을 덖거나 찐 것으로 찐 차는 요즘 녹차라고 많이 부르고 덖음차는 ‘차’라는 이름 이외에는 별다른 이름 없이 산지나 만드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덖음차와 찐 차의 맛은 차이가 있습니다. 잘 덖어서 만든 차를 마셔보면 그 맛이 쪄서 만든 녹차와는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차는 그 생산량도 적지만 가격도 비싸고 구하기도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우리는 으레 사람을 만나면 차 한잔 하자고 합니다. 여유롭게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삶에 여유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 듣기를 좋아합니다. 멀리 있는 동무가 나를 찾아서 올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동무와 함께 마시는 그윽한 차향을 생각합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마음이 나를 그렇게 항상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수선하고 어렵던 시절에 미군을 따라 들어온 인스턴트 커피가 우리의 차에 대한 인식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래서 ‘차’라 하면 우리는 일상으로 커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는 차는 단지 ‘차’라고 불리는 우리의 전통차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차는 마음을 평화로워지게 하고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하며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권건오

E-mail:fuoco@catholic.or.kr

말기 폐암으로 머리에도 퍼져서 1개월의 생존을 선고 받고 하루 하루를 이어 가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30년을 넘게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학래산방(鶴來山房) 에서 살다가 지금은 경기 안양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언제 떠날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