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새 법을 가르치시며 썩어 냄새나는 옛 나라를 바꾸어 이 땅에 세워질, 또 세워져야 할 새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당시 교권을 거머쥔 종교 수구보수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숙정하시어, 제사자들을 대상으로 수입을 챙기는 장사치들을 몰아 내시고 그들과 연결된 상납과 뇌물의 검은 고리를 끊어 내셨다.
‘거룩’의 탈 속에 숨은 구역질나는 가식과 위선을 준엄하게 질타하셨다.
“화 있으리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형벌을 피하려느냐?”
저들은 정말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을 수용할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였다. 새 술처럼 강한 팽창력을 지닌 가르침을 도저히 감당못해 터져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자 허울 좋은 구교 투쟁에 나선다.
(최근 이와 비슷한 사건이 우리 정계에도 있었다.)
당시 나라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가결 하였다.
그 즈음 어떤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를 찾아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니 예루살렘을 떠나 잠시 피신하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가서 헤롯에게 고하라. 내가 오늘과 내일, 모레는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
예수, 그 분은 이렇게 서슬퍼런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압력과 위협에 전혀 동요하지 아니 하시고 이 땅에 세워져야 할 새 나라 건설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 가셨다.
땅에 죽어 넘어진 정의를 일으켜 세우시며, 거짓에 짓눌려 숨 못쉬는 진실을 끌어 안으시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죽음의 십자가를 향하여 갈 길을 가셨다.
사람이 잘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어야 한다. 짐승과 달리 그 누울 곳을 가려야 한다. 코끼리나 특정한 짐승조차도 죽을 장소를 골라 놓고 살아간다는데, 하물며 사람이 아무길이나 걸을 수 없고 아무데서나 죽을 수는 없다. 그가 군인이라면 전장에서 전투하다 죽어야 한다. 스승이라면 교단에서 가르치다 쓰러져야 하고, 농부는 논 밭에서 농사짓다, 어부는 바다에서 고기 잡다가, 노동자는 일터에서, 성직자는 강단에서 그의 목숨을 내려 놓아야 떳떳하다.
그런데 오늘날 아무데서나 죽는 사람들이 있다.
청렴해야 할 공직자나 특히 검사들, 순수하고 열정적이어야 할 시민단체 간부나 노조간부들, 교사들이 뇌물이나 떡값 현장에서 쓰러지는 일은 사회와 나라의 불행이다. 농민이나 노동자들이 국회마당이나 도심의 거리에서 절규하며 쓰러지는 불행도 끊어야 한다. 더구나 성직자들이 더 나은 보수 때문에 다른 곳으로 늘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도 처량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쓰러져 죽을 곳은 썩은 동태 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역사의 한복판이어야 한다.
삶에 지친 민중들이 힘겨워 비틀거리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