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말에 농촌은 하나님이 만들고 도시는 악마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악마를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우리사회에서 흘린 땀의 댓가가 정당하게 돌아오지 않는 실망계층 맨 앞 줄에 농민이 있다.
해마다 파종품목 선정 때부터 시작되는 농민의 고뇌는 자식 키우는 정성조차 비킬 노력을들인 작물을 갈아엎을 때 절정을 이룬다. 해마다 도지는 고질적 아픔이다.
이런 농촌을 지켜낼 재간이 없어 희망의 젊음이 등진 후에 농촌엔 노쇠와 속으로 앓는 절망이 지병이 되고 소외와 열등감 덩어리들이 빈 둥지를 채운다.
농촌교회도 같이 앓는다. 저들의 마음밭에 열심히 소망을 파종하고 거름을 시비하지만 60배 100배가 아니라 슬픈 마이너스를 생산하는 아픔 말이다. 그래도 씨뿌려야 할 땅이 있고 설레는 봄기운이 농심을 간질이면 자석에 끌리듯 벌떡 일어나 논밭으로 달려가는 농민들의 손발은 연륜의 수전증을 떤다. 저들에겐 농삿일이 이미 노동이 아니라 신앙인 것이다. 그들이 딛고선 농토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이다.
농촌문제는 곧 농촌교회의 문제다. 텅 비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가난하다. 도시교회들이 농촌교회의 눈물로 찍어낸 벽돌로 거대한 성장의 건물을 짓고 부흥발전을 구가할 때 농촌교회는 실의의 밭을 갈아엎는다. 농촌교회에서 울며 뿌린 씨앗을 도시 대교회에서 웃으며 거둔다. 저들이 거대 건물을 짓고 각종 첨단기기들을 구입해서 입에 올릴 줄도 잘 모를 프로그램을 고안해내서 즐기고 떠들 때 농촌의 늙은 부모교회는 잃은 탕자의 메아리만 듣기 일쑤이다.
농촌은 도시의 고향이다. 농촌교회는 도시교인의 고향교회다. 설과 추석에만 귀성하지 말고 평주일에도 예배는 고향교회에 와서 드리는 효도를 하자. 도시교회는 풍부한 재정을 제 배 채우는 사업에만 쓰지 말고 가난한 부모교회, 고향교회에 보내서 농촌교회도 일하게 하자.
도시의 큰 교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무슨 연합사업이다, 성시화 사업이다, 조찬기도회다, 떠벌리지 말고 땅에 떨어져 묵묵히 썩어지고 죽어지길 바란다. 아예 농촌의 시든 작물까지 뽑아가려는 부도덕한 지도자가 있거든 금식기도로 참회해야 한다. 어디까지 높아지고 얼마까지 커지려고 하는가? 자식이 도시에 있어도 독거노인이 태반이요, 노쇠와 퇴행성 각종 질병을 앓고 있는 농촌교회. 고향교회의 부모님들, 권사님들은 오늘도 아들 며느리의 믿음 깃든 안부전화를 고대한다.
도시교회에서 가르쳐야할 덕목들이다. 현대의 가장 몹쓸병인 비만병 든 도시교회인들이여! 눈 좀 크게 뜨라! 장사 위해, 사업 위해 표몰이 위해 어중이떠중이 모여든 이들이 다 신앙인인 줄 착각하지 말라.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뜨라.
앞으로 분명히 있을 일은 농촌교회들, 소형의 교회들이 차례로 문을 닫기 시작하면 반드시 도시의 대형교회들의 문도 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농어촌 교회, 중소형 교회들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일에 세상경제의 논리나 시장원리를 내세우는 어리석음의 바벨탑을 쌓지 않기 바란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농사가 없어지면 기업으로 벌어 식량 사다 먹자고 하는 어리석은 말 하지말라. 자동차 열대 주고 쌀 한 말 사야될 때가 오지 않도록 농토나 산지를 공장으로 바꾸는 일 너무 벌려선 안된다.
요즈음 우리 지역도 무슨 개발이 되고 무슨 공장이 들어올 계획이고 어쩌면 대도시의 변두리쯤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은 공중에 뜬 말들이 간간이 들려온다.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사람 많아지면 교회도 인원이 늘어나리란 못난 꿈도 꿀 수 있지 않은가? 전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땅에서 얼마나 기대찬 소식인가?
그러나 소망을 접는다. 그게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가소로운 일일까? 오늘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만 있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농촌교회가 안고 있는 고뇌를 조용히 곱씹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