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어스름이 깔리던 어느 날 저녁 학교 도서관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책을 억지로 보다가 선생님 몰래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당진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 가슴을 뛰게 했던 그 영화는 바로 ‘로보캅’이었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후속으로 나온 로보캅 시리즈를 모두 섭렵했다. 이 영화 시리즈는 미래의 미국 디트로이트시를 그린다.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았던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면서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시 당국은 지방채를 남발하고 경찰업무마저 재벌기업인 ‘OCP’에 ‘민간위탁’한다. 그러나 재정적자 누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자 시 당국은 재벌기업 OCP에 자치권을 넘긴다. 시를 인수한 OCP가 펼치는 ‘기업가적 행정’은 과연 주민에게 미래와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재벌기업에 인수된 디트로이트시는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마저 돈과 시장논리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고 공공성은 이윤추구 앞에 설 곳을 잃어버린다. 정치와 기업, 범죄조직이 하나로 뭉쳐 과두제를 형성한 사회, 돈이면 무엇이든 통하는 사회.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분이 계급을 넘어 전근대의 신분제로 회귀하는 이 기막힌 현실에 우리의 영웅 ‘로보캅’이 고독한 전쟁을 벌인다.
이 영화가 상영되던 당시에는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영화가 그리는 미래사회가 하나 둘씩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지금 당진에서는 기업가적 경영행정이 주요 군정방침으로 제시되는가 하면 상수도와 가로청소에 대한 민간위탁이 추진되고 기업도시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황해경제자유구역 지정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황해경제자유구역의 대상지역은 당진 송악·석문, 아산 인주, 서산 지곡 등 3개 지구와 평택 포승과 화성 향남 등 2개 지구이다.
지난해 4월 충청남도와 경기도가 정부에 황해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신청했을 당시만 해도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는 기존 인천, 광양, 부산 등 3개 경제자유구역 중 가장 빠른 인천도 아직 개발 초기단계라며 성과가 가시화 될 때까지 기존 3개 지역을 위주로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재정경제부는 지난 8월17일 기존 3개 지역 이외에 2~3곳을 추가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의 개발성과가 가시화됐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기존 3개 경제자유구역의 경우 외자유치는 뒷전인 채 부동산 투기에다 지역이권다툼으로 변질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기존 경제자유구역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비슷한 숫자를 또 지정할 경우 희소성 감소로 인해 추진력이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대선을 의식한 정권 차원의 선심 쓰기라는 지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추가 지정이 유력시되는 지역도 여권이 표밭으로 생각하는 전북과 충남 서해안이다.
경제자유구역은 외국자본이 자유롭게 경영활동을 하고 외국기업들이 선호하는 투자여건·생활여건 등을 조성하는 것을 관건으로 하고 있다. 특히 근로기준법에 명시한 월차휴가 폐지, 생리휴가·주휴의 무급화, 파견제 허용, 노동3권 제약, 장애인·고령자 의무고용 회피 등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외국인 생활여건을 위해 외국 교육자본의 진출허용, 의료·법률 등의 사회적 서비스의 공공성 포기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정부는 새로 개정되는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감독권을 해당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떼어내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충남도는 정부의 방침을 재빨리 받아들여 “민간 주도의 특별지방자지체를 설립해 전문성과 자율성?창의성을 적극 활용해나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영화 ‘로보캅’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이가 비단 나뿐일까? 영화에서는 로보캅이 모순된 사회구조에 맞서지만 현실사회에서는 우리를 대신해 싸워줄 영웅은 없다. 팍팍한 현실에서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민초가 어차피 나설 수밖에 없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OCP의 디트로이트 같은 사회를 물려줄 순 없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