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許由)는 요임금이 천자로 삼으려 하자 기산(箕山)에 숨어들었다. 그후 요임금이 구주(九州), 천하의 장에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었다. 그때 허유의 친구인 소보(巢父)가 소를 몰고 오다가, ‘자네,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더러운 말을 들었기에 귀를 씻고 있는 중이네.’ ‘더러운 말이라니 그게 무언가?’ ‘임금께서 내게 천하를 넘겨준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구주의 장으로 삼는다고 하셨네.’ 허유의 말을 들은 소보는 소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더러워진 귀를 씻은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 없지 않은가!’ 허유와 소보가 얼마나 권력과 정치에 욕심이 없고 청렴한 인물인지 말해주는 일화이다.

요(堯)와 순(舜)과 우(禹)는 민의(民意)를 존중하고 덕의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성군(聖君)으로 불렸고, 하(夏)·은(殷)·주(周)가 나라를 새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백성의 뜻을 높이 받든 덕택이었다. 그리고 그 세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은 민의를 저버리고 가렴(苛斂)과 학정(虐政)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하나라의 걸왕(桀王)은 말희(?喜)라는 여인과의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달기라는 여인과의 포락지형으로, 주나라의 유왕(幽王)은 웃지 않는 여자 포사에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고 허랑방탕한 생활로 민초들의 고혈(膏血)을 짰기 때문에 각각 500여 년의 주기로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그러나 앞서간 선인(先人)들의 출중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앞으로 저마다의 처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곧, 주(周)의 문왕 서백(西伯)은 감옥에 갇혀 ‘주역(周易)’을 저술하고, 낙수(洛水) 서쪽의 기름진 땅을 바치면서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불에 달구고 죄인을 걸어가게 하는 ‘포락의 형벌’을 금지시켰으며, 공자(孔子)는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 재판관)라는 벼슬을 얻어 국력을 신장시켰으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치가 이뤄지지 않자, ‘인의(仁義)의 도(道)’를 펼치고자 세상을 떠돌 때 곤경을 겪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한 후에 ‘국어(國語)’를 저술했으며, 손빈(孫?)은 두 다리를 잘리고서도 ‘병법(兵法)’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방연에게 원수 갚음을 했고, 사마천(司馬遷)은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에 처해졌으면서도 2,500년 동안 제왕·제후들의 흥망성쇠 526,500자의 ‘사기(史記)’를 기술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천주학쟁이와 관련있다 하여 1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목민관(수령), 위정자들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 실천해야 하는 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세도정치를 펴는 홍국영(洪國榮)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에 은둔했으며, 홍국영이 실각하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북경을 거쳐 열하에 다녀온 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집필하였다. 그가 후일 1797년(61세)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어 충청감사와 불화를 겪으면서도 그당시 군내에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모두 방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흉년이 들자 자신의 봉록을 덜어 군민들을 구휼했으며, 농업과 관련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썼다. 그중 ‘부자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어라(限民名田議)’의 내용은 평등사상이 깃든 농업정책서로 당진의 정서가 듬뿍 담겨있다. 이 책을 본 정조가 ‘농서대전’을 박지원에게 편찬케 하라고 명했으나 다음해(1800년) 승하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도 나에게 처해진 어둡고 답답한 현실에 한탄하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개척하는 기회로 삼아 나날이 더욱 새로워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마음을 가진다면 모든 앞날은 빛나는 희망일 것이다. 지금쯤 둥근 한가위의 달은 두둥실 뜰 것이고, 너른 해나루 벌판의 황금물결은 예나 없이 찬란하리라 믿는다. 모두가 어렵다하는 세상, 온갖 시름 다 잊고 풍성한 마음 가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