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3월까지 눈이 내려 봄이 오겠나 싶게 하더니, 살금살금 뒷전까지 따라와 느닷없이 뒤통수치는 짓궂은 친구처럼 봄이 왔다.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새싹을 돋우는 나무들이며 봉오리를 밀어 올리는 꽃들이며 모두들 다급해 어쩔 줄 모른다. 맛있겠다 싶던 냉이는 자고 일어나니 꽃을 피우며 질겨지고, 예쁘다 싶은 벚꽃도 피자마자 잎을 떨군다. 유난히 서둘러 꽃잎을 떨어뜨리는 목련은 좋은 소리 한 번 못 듣고 봄을 나고 있다.
지난겨울,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내렸다며 지구의 이상기후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더니만, 봄이 오니 뒤늦게 더욱 실감이 난다. 갓 태어난 생명체가 찬찬히 무르익기를 기다려주지 않는 계절에 쫓겨 급하게 피고 지는 것이 둔감한 내 눈에도 보인다.
나는 천천히 차근차근 제 시간과 리듬을 보여줄 여유를 잃은 풀꽃들이 이 봄에 무척이나 아쉽다. 그래서 만개한 꽃송이를 보면서도 애틋하고 눈물겹다. 피워내자마자 떨구어지는 그들의 운명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여서다.
적당한 때를 무시하는 이상기후처럼 적절한 시기란 것에 괘념치 않는 부모와 사회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가만히 겹쳐 떠오른다.
길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마흔 넘게 살아오는 동안, 제 나이에 맞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고, 반드시 겪어야 할 시간을 겪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하고 있다. 어린 시절 받아야 할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충분히 놀고 충분히 먹고 충분히 자는 것,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어보는 것, 흙 밭 모래밭을 개의치 않고 맘껏 뒹굴어 보는 것, 믿고 따르던 부모에게 어느 날 따지고 대들어 보는 것, 재미난 책이나 영화에 빠져 밤을 꼴딱 새워보는 것, 벼락치기 시험공부 한답시고 커피를 주전자 째 들이켜 보는 것, 세상에서 제일 심각해 보이는 내 고민을 붙들고 이리저리 헤매는 것, 떠나간 애인 때문에 이불 뒤집어쓰고 죽네 사네 난리치는 것...... 이런 것들을 건너뛴 채 온전한 어른으로 성장한 사람을 나는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다.
가을에 만나는 달콤한 열매 속에는 그 열매를 지탱해주는 나무의 뿌리가 겨우내 끌어올린 수액이 흐르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땅속에 스며들어 있는 온갖 미생물이며 영양분, 계절마다 선물받은 햇볕, 바람, 빗물 들이 켜켜이 새겨져 있다. 작고 옹골진 그 열매는 때에 맞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한 덕분에, 속성으로 재배되어 보기 좋고 때깔 좋은 열매에 견줄 수 없는 단단함, 견고함, 풍부한 영양분을 담고 있다. 이제 이런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고, 우리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못나고 벌레 먹은 열매를 반긴다.
아이들은 식물과 같다.
그들에겐 좋은 터에 자리잡을 수 있게끔 안내하는 손길과 쾌적하고 적절하게 조성된 환경, 그리고 사랑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잘 자라 열매맺기를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천혜의 여건들을 물리치고 인공적인 조건을 만들어줄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들을 부모된 자로서의 의무로 생각하는데 그럴 의무는 더더욱 없다. 더 많은 이들이 아이들 주변에 펼쳐지는 이상기후를 핑계대기도 하지만, 온 사회에 불어닥친 성적위주, 점수위주의 광풍이 조성된 데 우리 책임이 없는지부터 먼저 반성해 볼 일이다. 아이들이 온전한 열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빨리 자라 빨리 떨어지는 열매가 되지 않도록 정성껏 살펴주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 이상한 기후는 싫다. 정상적인 기후가 되돌아와 봄날을 실컷 누려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