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악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었는데 첫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와서 심훈 선생님을 처음 만났지. 장조카가 서울서 공부하다 내려왔다고 삼촌(故 김종서)이 자랑삼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어. 그 때 삼촌 소개로 심훈 선생을 만났어. 삼촌과 심훈 선생은 동년배라서 잘 어울렸거든. 아, 그 양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그 때가 아마 심훈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일 거야. 심훈 선생 작고하신 게 36년이지?”
김관영 할아버지는 91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수십 년 전의 일을 어젯밤 일 이야기 하듯 풀어 놓으셨다. 할아버지가 1시간 반 가까이 쉬지도 않고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였다. 이야기 속에는 ‘해방, 이승만, 야학, 공동경작회, 상록수, 심훈’같은 역사의 굵직한 요소부터 ‘송악국민학교, 한진리 학살사건’ 등과 같은 지역의 역사들까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삼촌 친구로 글 쓰러 내려온 분인 줄만 알았지. 헌데 서울에 돌아와서 심훈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니 보통분이 아니시더라고. 그래서 나도 그분에게 기대고 한 번 살아보자 마음먹었지. 그런데 이내 돌아가셨지 뭐야. 그리고 훗날에는 심훈 선생이 쓴 상록수 속 이야기 같은 삶을 살아볼 생각도 했었어.”
김관영 할아버지는 <상록수> 후속편을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향에 야학을 열었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대학공부까지 마친 몇 안되는 지식인이었다. 결혼도 미루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심훈 선생의 자취를 따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때문에 졸업 후에 심훈 선생이 수학한 중국에 가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중국행을 포기하고 고향 송악으로 내려왔다.
“당시에는 면에 병사계라고 있어서 집에 있는 청년들을 노무자나 군인으로 끌고 갔었어. 부모님이 장남인 내가 끌려 갈까봐 노심초사 하시 길래, 아무 곳에나 가서 얼른 일을 시작해야 했지. 그래서 군청에서 일을 시작했어. 아, 근데 명색이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군에서 일한다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가 않잖아. 그래서 도청에 이력서를 내서 합격을 했지.”
김관영 할아버지는 충남도청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금 생산이 시급하다는 상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소금 주수입국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원활치 않자 국내에 소금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진 부근에 소금밭을 만들라는 지시가 있어서 현장에 가려고 출장을 나왔어. 그때 도청에서 출장을 나오면 보통 온양온천역에 숙소를 잡았거든. 그날도 온양온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왔는데 기차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거야. 그날이 바로 해방된 날이야.”
김관영 할아버지는 그 길로 고향 월곡리를 찾았다.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을 뵙고 나서 바로 찾아간 곳은 모교이기도 한 송악국민학교다.
“가만 생각을 해보니까 해방은 됐는데 학교가 문제겠더라고. 해방이 됐으니 한글을 가르쳐야 하는데 어제까지 일본말만 가르치다 누가 한글을 가르칠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아닌 게 아니라 애들이 운동장에 모여 놀고만 있는 거야. 그래서 동네에 있던 친구들을 불러 모았지. 한글을 깨친 친구들이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 가르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는 생전에 뵈었던 심훈 선생이 쓴 <상록수> 후편을 실제로 해보자는 마음이었어.”
이후 할아버지는 월곡리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천막을 쳤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할아버지의 ‘상록수 후편’ 꿈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매일 밤 젊은이들이 모이자 좌파세력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한동안 고향을 떠나 서울 등에서 숨어 살기도 했다고.
김관영 할아버지는 “심훈 선생이 소설 때문에 취재를 하려고 이집 저집 부엌에도 들어가고 나이 드신 분들에게 응석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며 “젊은 시절에는 나라를 생각했던 심훈 선생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월곡리 은행나무집’에 사신다. 할아버지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재호 씨(심훈의 삼남)를 비롯해 공동경작회를 실제로 봤고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전에 역사를 기록해 둬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할아버지처럼 은행나무도 심훈이 동네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셨던 모습을, 공동경작회 회원들이 모여 야학을 걱정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까. 500년 된 은행나무는 심훈의 <상록수>에도 등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