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오봉산과 암장봉 사이, 밤절
면천면 끝자락에 자리한 율사(栗寺)리는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고 큰 절이 있었다 하여 밤절이라 불리었다. 허나 지금은 고목이 된 밤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서산 운산면 와우리, 예산 봉산면 마교리와 접해 있는 율사리에는 오봉산과 암장봉이라는 두 산이 있다. 오봉산 자락과 암장봉에서 뻗은 산줄기가 모여 마을을 이뤘는데 골짜기가 모두 12골이나 된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골짜기마다 붙은 이름을 사용하는데 지형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율사리는 모두 8반이여~ 1반은 정문이라고 하지. 2반은 벗적골이랑 홍골이 합친데여. 옛날에 ‘벗적골에서 벗구 살래, 홍골에서 입구 살래’라는 말이 있었어. 버젓골이 바람이 안나고 따뜻해서 옷을 벗고 살 정도였다는 구만. 3반은 남산이요, 5반은 외론골이여. 집 한 채만 있어서 외로워, 외론골이라 불렀을랑가.”(오은섭, 76)
경로당에 모인 마을 어르신들이 어릴 적부터 불렀던 마을 지명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6반은 율사리의 이름이 유래된 절골과 밤절을 비롯해, 윗골, 칡덩굴골, 토장골(안토장골, 밖토장골)이라 불리었던 골짜기가 포함된다. 6반은 운산면 와우리와 접해 있는데 소가 드러누운 형상이라 하여 암소고개라 불리는 고개가 있다. 7반은 지형이 부처가 춤추는 형국에서 유래된 불무골이라 불린다. 8반은 암소고개와 함께 율사리에 유명한 고개로 예산 마교리로 넘어가는 간난쟁이고개(혹은 가는쟁이고개)가 있고, 매롱골, 원터골, 세룡골 등으로 이뤄졌다. 특히 매롱골은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율사리에는 현재 110여 호에 3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70대 노인들이 가장 많다. 벼농사 다음으로 꽈리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데 고령화로 고추농사를 접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고. 병자호란 때 내려온 해주 오 씨가 송학리와 함께 집성촌을 이뤘는데 지금은 10가구 정도만 남았다.
해방 전후, 사금 채취로 번성
여러 골짜기가 모인 율사리에는 하천이 흐르는데 1976년 삽교천방조제 공사가 시작돼 1979년 완공되기 전까지만 해도 물이 들어와 배가 다녔다고 한다.
“지금이야 하천에 물이 졸아 들었지만, 어릴 적 만해도 홀딱 벗고 들어가 멱도 감고 그랬지.”(이인환, 72)
“멱만 감았남? 배가 다닐 정도였지. 그나마 삽교천이 막혔으니 지금처럼 농사도 짓는 거여. 어디 그전에야 저수지가 없으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바라고 살았지. 가물면 논을 묵히기 일쑤였고 수수나 콩을 심는 곳도 많았지.”(오준섭, 72)
“아, 왜 하천에서 사금도 숱하게 캤지. 왜정시대엔 마을 사람들이 사금을 캐면 왜놈들이 다 걷어 가고 했었어.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사금을 캐는 이들이 많았어. 물 품어내는 방아까지 있었다니까.”
70여 년 전, 율사리에는 사금을 채취하는 금전이 있었다. 농사만큼 사금이 마을의 주된 소득이었다고 한다. 삽교천을 막기 전, 율사리 하천에 물이 많을 당시에는 주민도 많았단다. 마을이 가장 번창했을 때에는 주민이 800명을 넘었다고.
“‘율사리에서는 무쇠판장도 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 금을 팔 때는 마을이 성했었지. 지금은 작은 슈퍼만 있는 길(지방도 619호)을 따라 술집이 쭉 늘어서 있었어. 놀음하는 이들도 숱했고.”(오은섭, 76)
새해 첫날, 오봉산서 마을 안녕기원
율사리 곳곳에는 숨은 보물이 여럿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200년 넘게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고 있다. 나무 높이 12미터에 둘레만 2.7미터다.
느티나무 뒤로 솟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오봉산이다. 마을 주민들은 새해 첫날 오봉산 정상에 올라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높이 224미터에 다섯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 오봉산은 등산로가 설치되어 있어 약 1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율사리에는 오봉산 말고도 최고봉인 절골산, 월조산이 솟아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봉산을 등지고 들판을 내다보면 푸른 지붕의 작은 집이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신합덕천주교 남산공소이다. 공소는 인근지역에 천주교 본당이 없거나 본당이 너무 멀어서 교통이 어려운 곳에 세운 임시 성당을 일컫는다. 비록 상주하는 사제는 없으나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우촌을 형성해 자발적으로 만든 예배장소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남산공소는 현재 마을에 천주교인이 몇 남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