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오른쪽으로 보이는 방구바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붉은 쥐’ 적서리에 얽힌 전설

적서리는 대호지면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붉은 쥐’라는 뜻의 적서리 명칭에는 지형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적서리 지형이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이라는 것. 여기에 적서리 토색이 유난히 붉어 ‘붉을 적’자와 ‘쥐 서’자가 합해져 적서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적서리에는 지명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 있지. 옛날에 고양이 바위가 있었는데 고양이 때문에 쥐가 먹질 못해서 누렇게 늙어버렸다는 거야. 고양이가 무서워서 들에 내려오질 못한 거지.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고양이 바위를 부쉈어. 쥐가 마음껏 들로 내려와서 배불리 먹고 건강을 찾아 장수할 거라는 생각에서 말야.”

적서리는 골짜기마다 지형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대호만이 막히기 전 배가 드나들던 서쪽마을은 뱃말이라 불렸다. 남쪽 바닷마을 앞 갯벌에는 돌이 많아 돌개라 불렀다. 동남쪽 마을 뒷산 황새봉에는 선녀가 내려와 놀다 간다는 선녀골이 있다. 뱃말 서쪽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우와미, 물이 마르지 않는 논으로 오리들이 즐겨 찾았다하는 오리골, 노루가 다니던 길목이라는 큰노루목 등이 있다. 적서리는 총 5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 차천로 사당 입구. 연안차씨가 인근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어촌계 형성됐던 어촌마을의 변화

적서리는 1981년 대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바다에 둘러싸였던 반도였다. 지금은 주로 논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지만 30여 년 전만해도 어촌마을이었다. 어촌계도 형성되어 있었는데 1975년도에는 계원이 169명이었다 한다. 적서리 어촌계는 삼길포 앞바다, 석문면 도비도 초락도 앞바다와 접해 있었다. 서해 먼 바다로 나갈 여건이 좋아 대호만이 막히기 전에는 어업이 성황을 이뤘다. 특히 실치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했고 적서리 최북단 포추리 넓은 갯벌에서 나오는 낙지는 크고 맛이 좋아 ‘포추리 낙지’라면 인근에서도 모두 알아주었다. 70년대에는 한동안 갯지렁이가 많이 나 마을 사람들이 온통 갯지렁이 잡기에 매달린 적도 있었다고. 갯지렁이 채취작업이 실시되면 부녀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모를 심다말고 바다에 나갈 정도로 많은 소득을 올렸다.

1975년에는 적서리 어촌계를 재정비해 당시 어촌계장이었던 송세동 씨를 중심으로 마을공동 소득원을 조성하기 위해 굴양식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인천을 오가는 똑딱선이 하루에 한차례 오갔지. 적서리는 가뭄이 많고 샘을 파도 물이 솟질 않아서 주민들이 주로 바닷일에 매달렸어.”

“낙지, 갯지렁이, 실치가 유명했고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는 대부분이 올라올 정도로 어장이 풍성했지.”

“대호만이 막힌 뒤로는 간척지에 논농사를 주로 짓지. 밭농사는 호박고구마, 꽈리고추가 많은 편이고.”

▲ 300여 년 동안 적서리를 지켜온 느티나무. 주민들 돌 날라 만든 버스길

적서리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새마을운동이다. 7,80년대에 적서리 마을 주민들은 각종 공동사업장을 통해 ‘힘을 모아 다 함께 잘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척사업과 굴양식장 사업이다.

“여자는 머구리에, 남자는 지게에 돌을 지고 날라서 갯벌을 메웠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도 동네 사람들 전부 나와서 열심히 했어.”

주민들은 일일이 손으로 나른 돌로 갯벌을 매우고 농토를 만들었다. 농로를 버스길로 만든 것도 모두 주민들이다.

“집집마다 우마차라도 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을안길도 정비했지. 돌개에서 자갈이며 모레며 이고 지고 날라다 한거여. 지금은 시에서 해주는 일이지만 그때는 모두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직접 했지.”

새마을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돼 받은 시상금으로 소를 키워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주민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소득사업이었던 굴양식장은 양식 1년만에 대호만이 막히면서 사라졌다.

연안차씨 집성촌, 차천로 사당

적서리는 다양한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특히 연안차씨가 1반과 2반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조선 당대 문인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차천로 선생의 영당을 모신 사당도 적서리 1반에 자리하고 있다. 차천로 선생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강촌별곡’을 지은 인물로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되고 있다. 강촌별곡은 벼슬을 피해 경치 좋은 시골의 자연에 묻혀서 한가히 생활하는 정경을 그린 작품이다. 차 선생이 광해군 당시 모해를 입고 금강 하류에서 피난시절을 보냈던 당시 쓰인 이 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과 함께 가사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 이름을 날린 무관으로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면 문관에는 차천로 선생이 꼽힐 만큼 뛰어난 문필이었다고 한다.

한편 5반에는 의령남씨가 4반에는 여산송씨와 제주고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도성초등학교가 개교되기 전까지 적서리에서는 조금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녀야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2반에 고 차삼열 씨가 강습소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