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장(長), 우물 정(井), 장정리

정미면과 대호지면의 면계에 위치한 장정리는 명실공히 대호지면의 관문 마을이다. 지방도 647호선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길게 뻗은 장정리는 옛날부터 대호지면 사람들이 정미 천의장으로, 당진 읍내장으로 장을 보러 가던 길목이었다.

“장정리는 마을이 길어~. 길게 뻗은 마을이라고 해서 길 장(長)를 쓰고 있지. 또 마을에 오래전부터 항상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우물 정(井)를 더해 장정리라고 부르는 거여.”

장정리는 5개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1반은 상징말, 봉선골이라 불리는 두 골망으로 이뤄져 있는데 봉선골에는 봉선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2반은 매화낙지형의 명당이라 하여 맷골, 방죽이 있던 곳이라 하여 방죽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3반은 송전리로 넘어 가는 가루고개와 옛날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절 배가 정박했다 하여 붙었다는 정주말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4반은 장정리 중심에 위치한 점말, 진마루 등이라 불리는데 점말에는 옹기점이 있었다고 한다. 5반은 옛날에 부자가 살면서 마을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장자골로 이뤄져 있다.

장승백이와 고래샘

장정리에는 두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을의 지명과 관련이 깊은 고래샘이다.

장정리는 원래 신라 경덕왕때부터 큰 우물이 있다하여 정곡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장정리에는 마르지 않는 용출수가 나오는 샘이 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주민들은 고래가 물을 뿜듯이 물이 잘 난다고 하여 고래샘이라 이름붙였다. 지난 1997년 주변 경지 정리 사업당시 주민들은 고래샘 주변을 가꾸어 정원으로 꾸몄다.

고래샘 주변에는 분수대와 정자가 설치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정성스레 기르는 잉어들도 놀고 있다. 고래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지금까지도 주변 농지의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이 천수답이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고래샘은 장정리의 주요 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장정리 입구에 서 있는 장승과 관련되어 있다.

“1886년 마을에 가뭄이 심하고 전염병이 발생해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해요. 초가집 수십채가 원인모를 화재로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요. 그러던 중 그해 늦은 여름 어느날 시주를 봉양받기 위해 찾아온 노승이 부락에 지세가 길고 기울어짐이 급하니 부락의 끝지점에 대장군을 세우면 화를 면할 것이라 이야기 했다네요.”

이에 이듬해 4월에 인근 정미면 대조리, 승산리 주민들과 함께 암 수 소나무를 골라 장승을 세웠다. 장승을 세우고 난 뒤 마을에 평안이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헌데 1950년 6.25 전쟁 당시 장승이 소멸되어 1992년 장정리 노인회에서 주최해 당시 군비를 지원받아 돌장승으로 재건립했다.

4.4만세운동과 농촌마을 장정리

장정리는 여느 농촌마을과 다름없이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반면 대호지면에 특수작목을 제일 먼저 들여와 시작한 마을이기도 하다.

“꽈리고추도 대호지면에서는 처음으로 장정리에서 재배를 시작했지. 그 뒤로 대호지면 전체에 퍼진 거여. 달래도 마찬가지고. 장정리가 선두자였지.”

장정리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은 옛날 마을이야기를 회상하다 4.4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 놓으셨다.

“그때는 정미와 대호지를 잇는 길이라고는 지금 장정리를 가로지르는 길밖에 없었어. 당시 대호지면장이 신작로를 닦는다는 걸 핑계삼아 부역하러 나오라고 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했다지. 우리 마을에서도 30명 넘는 어른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