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이 변했다. 가옥도 농지도. 새롭지 않은 건 사람뿐이다. 다만 마을을 뛰놀던 아이들은 모두 흰머리 성성한 노인이 됐다. 시간이 마을을 휩쓸고 간 흔적이다. 어제 없던 건물이 오늘 생기고, 사람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도시보다 변화의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히 마을의 모습은 달라졌다. 6.25 전쟁을 기점으로 그랬다. 지난 18일 찾아간 합덕읍 성동리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회 회원들은 마을을 이렇게 기억했다.

토성 동쪽에 자리잡은 성동리
목간말, 매물, 개똥밭, 절골, 새뜸, 아래뜸, 방둑. 이렇게 일곱 개의 반으로 이뤄진 합덕 성동리는 ‘성(城)의 동쪽에 있다’하여 성동리라 불렸다.
“성동산에 올라가면 성제(성터)가 있어. 동서남북이 그 성을 따라 갈렸는데 우리 마을이 성의 동쪽에 있어 성동리라 불렀지.”
표정길 노인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성동산 속 작은 암자 용연암 옆 샛길로 들어서자, 노인회 회원들이 얘기한 대로 나지막한 토성이 다져져 있었다. 언제 축조된 토성인지 역사적 기록이 없어 마을 주민들은 후백제 무렵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긴 세월이 흘러 토성 주변에 나무 덤불이 무성해 “이게 성이었다”는 설명을 들어야만 알 수 있을 정도다.
용연암 아래쪽으로는 큰 미륵불이 있었단다.
“사람 키로 한 개 반이 넘었어. 그런데 목하고 팔 한쪽 이 잘려 있었지. 누구는 사라진 미륵 얼굴이 ‘샘에 뭍혔다’고도 하고, ‘어디 주춧돌로 썼다더라’하는 얘기들이 있었어. 아무튼 그 미륵상은 80년대 중반쯤 산 주인이 팔았다더라고. 지금에야 마을 주민들이 반대하면 그렇게 못했을 거여.”
일제 강점기,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글을 배우던 강습소도 이제는 밭이 돼 터만 남았고 마을에 있던 오래된 소나무도 잘려 나갔다.
노인회 한 회원은 “100m는 될 법한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왜정 때 장사꾼들이 다 잘라서 팔아먹었다”며 “나무의 밑둥은 절구통을 만들어 썼다”고 기억했다.
비가 오지 않아 마른 밭 옆으로 덤불에 둘러싸인 열녀문 처마가 빠끔히 보인다. 문 씨 문중의 열녀문이란다. 그동안 뜸했던 사람의 발길 대신 이름 모를 나무와 잡풀들이 자리를 채웠다. 풀숲을 겨우 헤치고 들어가서야 목판에 쓰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역사적 기록이든, 유산이든 너무 등한시 한 것 같어. 그런 걸 연구할 만큼 공부했던 사람도 읎었고.”

연꽃 그득했던 연호방죽
과거 논농사와 밭농사의 비율이 거의 절반씩 이었던 성동리였지만 지금은 논농사가 주를 이루는 마을이 됐다.
“폐농지는 별로 없고 다 개간한 거여. 연호방죽 부근의 땅을 흡수하기도 했지.”
역시 후백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연호방죽(합덕제)은 견훤이 왕건과의 전쟁을 앞두고 군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저수지를 팠다고 전해져 온다. 그 크기가 자그마치 103정보로 1정보에 3000평인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방죽 안에 연꽃들로 그득했어. 연꽃이 필 무렵이면 참 이뻤지. 방죽에서 고기도 잡아먹고. 그때가 좋았어, 그때가…”
조선시대에는 김제의 벽골제, 연안 남대지와 함께 조선 3대 저수지로 손꼽혔던 연호방죽은 마을사람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지금은 흔적만 있는데 ‘용천’이라고 해서 샘물 나는 곳이 있었어. 요즘처럼 이렇게 가물면 거기서 기우제를 지내곤 했어. 명당이었지. 방죽 안에 흙을 지어다가 만든 인공섬도 있었고.”
1960년대 들어 연호방죽은 농경지로 이용되면서 제방 1,771m만 남고 103만m²는 사유지가 됐다. 최근에는 시에서 이를 복원 중이다.

“환갑이면 젊은이라니까”
예로부터 신창 표 씨가 집성촌을 이뤄 살아온 성동리는 마을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표 씨 집안이다. 이날 경로당에 모인 노인회 회원들도 9명 중 6명이 표 씨였다.
“자식들은 거의 다 나가 살어. 서울이나 경기도 쪽으로 주로 나갔고. 마을에 더러 젊은이들이 있는데 많지는 않지. 지금 마을에서는 환갑이면 청년이라니께.”
그들의 10대, 혹은 20대를 관통한 6.25 전쟁 때 몇몇 주민들이 끌려가 학살도 당했단다. 합덕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에는 성동산으로 소풍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짜기마다 넘쳐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몇 안 되는 마을 아이들 중 절반은 합덕 초등학교에, 나머지 절반은 신촌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옛날에 면천중학교가 면천보습학교였는디, 지금은 중학교를 글리 댕겨.”
초가집뿐이던 동네가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옥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단다.
“지금이야 석면이다, 뭐다 하지만 그 땐 정부에서 다 지붕에 슬레트 얹고 그렇게 바꿨어. 이제 우리 마을도 석면 교체작업을 해야 하는디, 눈에 잘 띄는 큰 길가부터 하니 구석진 촌동네는 언제 바꿔 줄런지 몰러.”
“나는 그냥 틀니나 좀 지원해 줬음 좋겄어. 노인네들 죽기 전에 음식이라도 편히 먹을 수 있어야지. 틀니가 제일로 목돈 들어가는 일이거든.”
“경로당에 운동기구나 좀 늘려줬음 좋겄구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회 회원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낡은 기억에서 늙음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덤불로 가득해 숨은 그림 찾듯 찾아내야 하는 성동산성과 열녀문, 옛 부터 마을을 지켜온 이들의 추억 속에만 있는 미륵불과 오래된 소나무를 기억하는 건 바로 이들, 78명의 성동리 노인회 회원들 뿐이다.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