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근 우강면노인대학장이 내포문화의 중심지가 원래 우강면 창리였다며 창리 들녘을 가리키고 있다.
유흥근 우강면노인대학장이 내포문화의 중심지가 원래 우강면 창리였다며 창리 들녘을 가리키고 있다.

내포문화의 중심지는 원래 우강면 창리로 이 지역에 대한 역사 복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오래전부터 우강면의 역사에 대해 연구해 온 유흥근 우강면노인대학장에 따르면 우강면 창리(倉里)는 ‘남창(南倉)’이라고 불리던 창고가 있던 마을로, 남창은 서천, 태안, 서산, 해미, 덕산, 청양, 보령, 부여, 당진 등 충남 전역에서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우강면 대부분의 들판은 당시 배의 왕래가 용이한 깊은 바다였기 때문에 남창에 보관한 곡물은 봄이 되면 뱃길을 따라 510리 길을 운반돼 서울 경창으로 보내졌다고 한다(세종실록지리지 참조).

배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남창 인근의 산에는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당이 있었고 이 산을 일컬어 마을사람들은 ‘당뿌리’라 불렀다. 한편 이 당뿌리에는 창고침탈 및 조세약탈을 막기 위해 성을 축조했고 이는 당뿌리 끝이 용의 머리모양을 닮았다 하여 용성(龍城)이라 이름 지어 졌다. 현재 용성은 성터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 남창이 있던 앞바다가 모래 등 퇴적물이 쌓이면서 남창은 아산의 공세곶창(지금의 공세리)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신증동국여지승람 참조).

점점 바다가 얕아지자 사람들은 남창이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 바다를 막아 둑을 쌓았고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일궈나갔다. 아산과 당진 지역의 육지를 연결해 둘러쌓은 석호 형태의 둑(포浦) 을 쌓은 지역이 소들강문(우강)이며, 사람들이 그 둑 안 지역을 ‘포내(浦內)’라고 부르다 그게 변화하여 내포가 된 것이라고 한다.

유흥근 학장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원래 내포라고 불리던 것은 지금의 홍성지역이 아니라 우강지역을 의미한다”며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화관광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역사복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진시청 이해선 문화체육과장은 “현재 지역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문화재 지정시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는 등 문제가 있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며 “내년에 창리를 포함한 당진 곳곳의 비지정 문화재를 총괄 조사해 데이터 베이스화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문화재 지정이나 복원 등은 아직까지 불투명한 상태로 내다봤다.

유 학장은 “충남도청이 내려오고 내포지역에 관심이 집중되는 시점에서 이 지역 역사 복원은 꼭 필요한 일”이라며 “남창이 있던 자리에 비석을 건립하거나 남창을 재현하고, 용성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