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향사시도(花香四時圖)
화향사시도(花香四時圖)

경계를 넘나든다. 아니, 그에게 경계란 없다.

20년 간 수묵화를 주로 그려오던 박동구 작가는 5년 전 채색화에 눈을 돌렸다. 2008년 개인전을 연 이후 스스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수묵화를 하면서 느낀 권태로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에 고수해온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물감을 그대로 쓰지 않아요. 다양한 재료들을 섞어서 새로운 색, 새로운 질감을 만들지요. 이 방법은 그림의 탈색과 변질을 막는 효과도 있어요.”

박 작가의 작업 탁자에는 아크릴 물감은 물론이고 분채, 석채 등 색색의 가루 물감도 즐비하다. 분채와 석채는 물과 아교를 섞어 갠다. 여기에는 색을 지속시키기 위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때 사용하는 백반도 들어간다.

그는 종이에 색을 칠하는 게 아니라 덧입혀 층을 쌓는다. 원하는 발색이 나올 때까지 색을 입히고 또 입힌다. 이 방법은 그림에 입체감을 주는 효과도 있다.

특히 그의 그림은 자연적, 전통적이면서도 현대 삶에서 필수적인 컴퓨터의 픽셀을 상징하는 망점으로 구성돼 있어 오묘한 느낌을 준다. 망점을 일일이 찍다보니 그의 작품은 대개 3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는 “컴퓨터를 부팅할 때 뭔지 모를 새로운 기대감 같은 게 들지 않냐”며 “꽃이 주는 느낌과 연결시켰다”고 말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바탕이 되는 종이도 그냥 쓰는 법이 없다. 장지에 풀을 먹이고, 말리 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종이를 만드는 데에만 15번의 손이 간다. 이렇게 풀 먹은 종이는 내구성이 좋다.

‘화향사시도(花香四時圖)’라고 이름 붙은 이 작품<사진>은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에 검은 물감이 아닌 먹을 깔았다. 이것 역시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발색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모든 배경이 같은 검정이 아니라 먹 특유의 농담(濃淡)이 담겨있다.

박동구 작가 장지와 먹, 아크릴 물감, 분채, 석채, 아교, 백반… 동서양을 넘나드는 재료가 만나 꽃이 된다.

박 작가는 “꽃은 지루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기쁨과 행복을 준다”며 “한국의 야생화를 주로 그리다가 최근에는 매화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화는 마치 작가 자신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화는 혹독하고 고된 겨울을 견뎌내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지요. 작가 또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많은 고뇌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해요. 그렇게 작품이 탄생해 작품 속에 ‘나’의 사유를 보여줬을 때, 꽃을 틔우는 것과 같은 환희를 느낍니다.”

화사한 매화로 가득한 화향사시도의 검은 먹 바탕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고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고통 속에 피워낸 꽃은 오는 30일부터 강남구 역삼동 유나이티드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또 인사동 아트센터에서도 3월 20일부터 전시가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