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현대판 귀족집단이 형성돼 왔다. 이들은 故 성완종 회장 사건에서 보여주듯 오블리제 없는 노블레스, 즉 ‘의무를 망각한 귀족집단’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돈과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식 천민문화’에 기인한다. 이는 기실 ‘천민적 졸부의 문화’이며, 이들에게 오블리제란 경제적 낭비이자 사회적 과시에 불과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 시대 지배층의 역사적 정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통성 있는 세력이 그 시대 지배층일 경우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줄을 잇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당나라의 군사지원에서 많이 찾지만, 그보다는 화랑으로 대표되는 신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 660년 김유신의 동생 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로부터 수세에 몰리자 아들 반굴에게 지금이 충과 효를 함께 이룰 수 있는 기회라면서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반굴의 장렬한 전사를 본 장수 품일은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고, 두 장수 아들의 전사는 신라 군사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나당전쟁 때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이들은 자식들에게만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김유신이 누구도 불가능하게 여겼던 평양 식량수송 작전을 자청했던 서기 671년 겨울, 그의 나이는 이미 67세였다. 그리고 김춘추는 험한 뱃길과 대륙을 마다하지 않고 고구려·왜·당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과 호족들의 권력투쟁이 한창이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 사이의 권력투쟁 끝에 장남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세 나라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차이가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양반과 유생들이 주도한 의병에서 볼 수 있듯 조선시대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치열한 당쟁 끝에 보수세력인 노론의 일당독재가 고착화된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사라지고 일반 백성들을 착취하는 특권층만 남았다. 이들은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외면하고 그 부담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떠넘길 정도로 비양심적인 특권층이었다. 노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때 집권당이었으나 나라가 망한 뒤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야당이었던 소론의 이회영 6형제와 재야에 있던 남인의 이상룡 등은 독립운동에 나서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쳤다. 해방은 노론과 친일파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사회 지배층의 지위를 독립운동가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처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조성된 냉전과 이승만의 집권은 친일파들을 다시 득세하게 만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을 다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에게 다시 억압받았다. 사회 주류가 된 이들 친일파 출신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친일파들은 군사정권과 결탁해 개발독재의 최대 수혜자가 되면서 이 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했다. 결국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역사적 정통성이 없는 세력이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도 실종되고 만 것이다. 언제쯤 이 땅에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모쪼록 故 성완종 회장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