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에 의해 고려가 918년 건국 후 936년에 한반도 재통일을 이루었다. 유목제국인 요. 금나라 등과의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3강구도의 팽팽한 세력균형을 유지하며 송나라와는 우방관계를 맺는 등 균형외교에 힘썼으나 우왕대에 왕권이 약화되면서 1392년 이성계의 쿠데타로 멸망하기까지 강대국 틈에서 474년이란 긴 역사를 이어왔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임에도 27대왕, 519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왕권과 나라를 유지한 내면에는 인간다운 인간들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 졌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우매한 무리들이 사람다운 지식인들을 모함하고 배척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살아있고 그들의 선비정신과 희생 그리고 정의로운 길을 쉼 없이 걸었기에 종국에는 義가 승리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선조 때 평안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두루 거치며 철저한 책임감과 오직 가난한 백성만을 위해 일했던 오리 이원익은 선조32년에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영의정에 오른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유린되고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는데 진력하기보다는 질투와 시기, 의심 등 수준이하의 행태로 충신이 발붙일 공간이 없었다. 이원익은 임금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오소서!”하며 바른 판단을 구했고, 요지부동일 때는 건강과 자신이 부족함을 들어 툭하면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제수되었으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또다시 사임 상소를 올리자 광해군이 허락했다. 두 임금을 거쳐 18번째의 사직상소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는 향리인 여주로 돌아가 삼간초옥에 묻혔다.

같은 시대에 살았고 우리들에게 오성과 한음(이덕형)으로 유명한 이항복은 선조 때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맡아 전란극복에 힘썼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고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폐모살제를 시도하자 조정은 찬반으로 나뉘어 논란이 가중되자 약삭빠른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이 앞장서고 종친, 외척 등 80여명도 찬성하고 나서자 영의정 기자헌은 피를 토하는 탄식 속에 궐을 떠나고 이항복은 중풍으로 반신불수임에도 강력한 반대상소로 삭탈관직 되어 북청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태종, 세조, 연산군, 선조, 광해군과 같은 서슬 퍼런 왕권 앞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흔들림 없이 義의 길을 갔던 선비정신이 있었기에 나라가 지탱되어 500년이란 역사를 이어왔던 것이다.

김정은이 수소탄까지 개발하고 미국본토까지 사정권에 드는 미사일실험과 북·미간의 싸움에 우리의 피해가 막심함에도 사전준비 없이 대통령의 개성공단폐쇄와 남북 간에 신냉전체제로 인해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 또한 빚더미에 앉은 국민들은 끝 모를 경제침체에 희망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오로지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 자리를 두고 점입가경이다.

쓴 소리한 자들을 내쫒기 위해 벌어지는 희대의 4류 막장드라마 같은 행태들은 군사독재시대 몸 바쳐 피눈물로 이룬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비등하자 급기야 정의화 국회의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공천이란 이름으로 정당, 의회민주주의, 법치국가의 기본원칙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이건 공천이 아닌 사천(私薦)이며 비민주적인 숙청과 다름없고 조선시대 사화(士禍)와 같다며 점점 비정상으로 가고 있다”고 일갈했다.

일찍이 공자님도 “良藥은 苦於口이나 利於病이요, 忠言은 逆於耳이나 利於行이니라”(좋은 약은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롭고, 충성된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행동에는 이롭다) 했다. 역사를 통해 수없이 보았듯 인의장막에 갇혀 달콤한 말만 즐기던 절대 권력자들의 말로는 비참했음을 교훈으로 삼고 이 시대 의인이 있다면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위로를 받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