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일, 당시 필자는 국회 환노위 국정감사장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바 있다. 밀양의 765kV 송전철탑 건설로 인한 주민피해와 관련해 앞서 전국 최초로 765kV 송전철탑이 건설됐던 당진지역의 실제 피해사례를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순서를 기다리던 필자 앞에 낯선 외국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바로 요즘 가습기살균제로 전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옥시 레킷 벤키저의 당시 대표였던 샤시 쉐커라파카였다.
그는 “저희 제품을 사용함으로 인해 이런 불행을 겪었다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안타깝고 송구스럽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며 “이 제품을 판매할 당시 안전하다고 진심으로 믿었으며 조금이라도 유해하다는 의심이 들었다면 절대 생산, 판매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법률적인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재판과는 별도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던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50억 원에 달하는 기금을 출연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방청석에 앉아있던 가습기피해자 대표들은 명확한 책임 인정과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인도적 지원’ 운운한 샤시 쉐커라파카 대표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피해자 대표는 “수백 명을 죽고 다치게 한 기업이 ‘인도적 지원’이라니 기가 막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한 책임 인정을 전제로 한 피해자 ‘배상’이 아닌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는 잘못이 없는데 사정이 딱하게 됐으니 넓은 마음으로 돈 좀 내겠다’는 얘기다. 뒷좌석에서 참고인 증언을 기다리던 필자에게도 피해자 대표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이되면서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게 벌써 3년 전이다. 수백 명의 산모와 어린이들이 죽어갈 때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는 한 없이 미뤄져 갔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해당 기업은 막대한 돈을 벌었고 책임자들은 연구자료를 조작하고 증거를 은폐했다. 뒤늦게나마 검찰이 가해자들에 대한 소환조사에 나서자 그제야 롯데마트와 옥시의 대표가 너무나 뒤늦은, 영혼 없는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속으로 어서 이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국민들이 빨리 이 문제를 잊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잊혀 지면 또 언젠가 이윤을 위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 따윈 안중에도 없이 또 하나의 괴물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아니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끔찍한 참사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고 옥시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에 나서고 있는 이때에 대형유통업체들은 매장에 버젓이 옥시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언론에 옥시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와서 추가 주문 중단 일뿐 판매중단은 아니었다는 둥의 핑계를 대고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형유통업체들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참사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대부분의 유통업체들은 자체 PB 상품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하다가 피해를 낳았다. 이러한 책임 있는 업체들이 고작 몇 푼의 이익을 위해 옥시제품 판매에 연연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도 저버린 행동이다.
당진지역의 대형유통업체들도 이 후안무치한 담합에 동참하고 있다. 당진지역 시민사회소비자단체들이 직접 지역의 주요 대형유통업체인 롯데마트, GS수퍼마켓, 서우마트, 하모니마트, 농협 하나로마트 등의 매장을 직접 돌아본 결과 전과 별 다름없이 옥시제품을 진열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들 업체 측은 대부분 “본사의 지침에 따라 눈에 잘 띄는 곳만 철수했을 뿐 나머지는 예전대로 판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심지어 GS수퍼마켓 당진점에서는 옥시제품 판매를 규탄하는 시민사회소비자단체의 기자회견을 방해하고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최소한의 양심, 최소한의 가치조차 지키지 못하는 기업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옥시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지금이라도 당진지역의 대형유통업체들은 옥시제품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책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부의 책임이 그 중 크다. 세정 목적으로나 사용돼야 할 화학물질이 가습기 살균제로 탈바꿈했을 때 왜 막지 못했는지, 원인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특정하고도 왜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제 죽어간 어린이들에게 어른된 도리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대로 잊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