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중 하 합덕읍 도곡리

누구도 참답게 사는 길을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

오래 산 뒤에 노숙(老熟)이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 달력을 뜯을까 말까 망설여진다. 금년도 저물었다. 젊은이들이야 주저함없이 며칠 남지않은 달력을 찢어내어 새해를 미리 맞는 기쁨이 있겠지만 노인들은 촌각(寸刻)이라도 아쉬워 자꾸 쓰러져 가는 날과 때가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지며 울컥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는 때가 바로 연말을 며칠 앞둔 날들이다.

“한손에 막대잡고 또 한손에 가시를 쥐어/늙은 길 가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백발이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유일한 인생을 한탄한 고려말기 충신이었던 좧우탁좩의 시조 한수가 우선 앞서는 것이다. “가장 얻기 어렵고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시간이다”라고 중국고전 후한서에 기록된 글귀다.

우리들에게 몇십년전만 하여도 경로사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노인을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두 우러러 보았으며 “에헴”하는 기침소리에 무게가 실려있었고, 당당한 걸음걸이는 공경스럽고 어려움을 느끼는 대상이 되어왔다. 많은 자손들을 키우고 사랑하는 자손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아서 좌절감과 무력함과 소외감이 없이 지냈다. 그러므로 백발은 권위의 상징이요, 주름살은 지혜의 표징이었다.

요즈음의 노인들은 산업화 사회와 핵가족제에 밀려 어떤 대접을 받고 살고 있는가를 각자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외국잡지에 나온 콩트를 소개한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밖에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백발의 한 노인이 어느날 힘없이 떨리는 손에 들었던 그릇을 떨어뜨려 깨졌다. 옆에 있던 젊은 며느리가 사정없이 퍼붓는다. “저 망령 좀봐! 밤낮 일만 저지른다니깐” 그때 아들애가 묵묵히 테이불 밑에 기어들어가 깨진 그릇 조각을 주워 모은다. “넌 뭘 하는 거지?” 서슬이 푸르게 묻는 엄마에게 아들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엄마가 이 다음에 늙은이가 되었을 때를 위해 남겨두려는 거야”

무모노성인(無侮老成人)이란 노성인을 경멸하지 말라는 말이다. 노성인은 인간의 보배중에 보배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참답게 사는 길을 처음부터 단번에 알지 못하고 한평생 그 길을 찾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참답게 사는 길이다. 이를 노숙(老熟)이라고 하며 노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윤중하씨!

윤중하씨는 고희를 훨씬 넘긴 고령에도 젊음을 간직하고 활달하고 강직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30년전에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이 처음에는 검게 자라다가 희긋희긋 하더니 이제는 백발로 변한 것이 변화의 전부인 듯한 인상을 남긴다.

윤중하씨에게 삶의 철학을 물었더니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정말 웃는 사람이지요. 인생의 종말인 노년에 이르러 나의 인생은 보람있는 인생이요, 행복한 일생이라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참으로 인생의 행복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승리의 월계관을 쓴 자랑스러운 노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노인들의 가치관을 말하면서 나같은 사람은 어림도 없다고 말문을 가로 막는다.

세모에 교훈적인 말씀을 청했더니 “온종일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안락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성실하게 열심히 산 사람만이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는 것처럼 노력한 만큼 보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으로 태어나 나의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는 만족감과 자신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라고 당당하게 설교식으로 토로한다.

윤중하씨!

윤중하씨는 10여대째 합덕읍 도곡리에 터전을 잡고 있는 해남윤씨의 집성촌을 이루는 곳에서 나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참 젊었을 때 도곡리 이장 8년과 새마을지도자 7년등 15년이란 긴 세월을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몸을 불태워가면서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했다고 자부심도 만만치 않다.

윤중하씨는 6.25전쟁중 제주도에 있는 훈련소에서 소송병으로 근무했다. 미군의 LST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하고 있을 때 미군사병이 국군의 훈련소장인 장군의 뺨을 치는 것을 목격했다. 이유야 어쨌든 사병이 장군의 뺨을 치는데 분격했다. 옆에서 바라만 보아야하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우리도 잘 살아야한다”고 각오했다.

이후부터 윤중하씨에게 잘 살아야 된다는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때의 광경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후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의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를 맡으면서 더욱 이때의 결의는 굳어졌다. 마을이 잘 살면 나라도 부강해진다는 생각뿐 “너의 비리도 용서할 수 없지만 나의 부정은 더욱 용납할 수 없다”고 다져가면서 그 당시 매일매일 터져나오는 새마을사업에 마을 전주민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소하천 정리공사, 마을안길과 농로포장, 개울에 걸치는 다리, 초가지붕 개량, 임야개간등등... 부락 야산에 뽕나무를 심어 마을 전체 주민들이 참여하게끔 누에를 쳐서 큰 소득을 올리게 했음은 물론이요, 축산업을 장려하여 오늘의 도곡리에 축산단지를 이룩하는데 효시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윤중하씨는 “우리모두는 항상 기쁜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야 노년을 잘 마무리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