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국 농민의 역사는 치열하다. 조선 말기 사회 혼란과 정부 권력자들의 무능, 부패로 말미암아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에는 농민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른바 조선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확립한 식민지 지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수탈 체제의 고통에 맞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이러한 농민운동을 한결 성숙시켜준 계기가 된 3.1운동에도 농민이 주축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아래에서 지주와 소작농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인 각종 사건의 중심 구성원이 결국 인구의 8할을 차지하던 농민이었다는 점도 농민이 얼마나 치열한 역사를 겪어 왔고,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해 왔는가를 반증한다.

오늘날 농민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가. 농업인구의 절대적인 감소와 고령화, 불안정한 농산물 가격, 농업경영의 수지 불균형 등 어느 하나 긍정적인 단어를 찾기 어렵다. 또 다른 치열한 역사를 겪고 있지만, 그 분위기와 위치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그대로 그 앞서 있던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세 단계의 산업혁명을 거쳐 오면서 인류는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을 이뤘다. 더 적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내는 시대를 만들었지만 이는 결국 탈(脫) 농업의 촉매제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모바일(Mobile) 등 첨단 정보통신 기술(ICT)이 경제 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 변화를 일으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우리 농민의 현재 위치가 더 힘겨워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마냥 부정하고 방관할 수만은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이미 20여 년 전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생산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자가 필요 없는 세상을 예견했고, 바로 지금 그 일련의 과정들이 현실화 되고 있다. 농업 외의 분야에서도 경제는 성장하지만 노동에서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일자리와 부가가치는 점점 더 소수에게 집중되고 실업자는 늘어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과거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던 생산자 중심의 경제 사고에서, 공급에 대한 수요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대, 즉 소비가 중요한 시대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 그 대표적인 논의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은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농민은 단순한 노동자의 위치가 아닌 식량 산업의 생산자이기도 하며, 생산 품목의 특수성이 여타 생산자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을 획기적으로 지급함으로써 농민의 어려움을 해소시키는 것은 식량 산업을 지탱 할 뿐 아니라 농민의 소비력을 증가시켜 농촌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불러올 수 있다.

농촌이 어느 정도 편리하고 살만하다고 느껴야 청년층이 유입된다. 농업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농은 104만명으로 전체 농업인구의 46%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40세 미만 청년농은 20만명으로 9%에 불과한 것이 농촌 현실이다. 현재의 기반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도록 기본소득으로 우리 식량 산업을 지탱하고 청년농을 유입시킬 수 있는 소득 및 주거 여건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우선의 과제다.

또 다른 유기적 화두는 농민에 대한 정년제와 은퇴농에 대한 연금제다. 70~80대 이상의 고령 농업인이 1인당 0.68ha 정도로 작은 경영 면적과 복잡한 유통구조, 농산물의 수급불안, 낮은 생산성 등 불리한 경영 여건 속에서 1000만 원 이하의 낮은 연소득에도 불구하고 은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고령농의 은퇴를 유도하고 농민의 공익적 기여에 대한 경제적 보상 차원에서 공적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은퇴 농업인의 농지를 실제 농업에 종사할 청년들이 취득할 수 있도록 유도해 농업을 규모화하고 농업의 세대교체를 이루는 것이 미루지 못할 또 다른 과제다. 기본소득을 위시하여 그 명칭을 불문하고 농민들에게 부여하는 혜택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의 빈곤을 면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경제적 선순환 효과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칫 외면하기 쉬운 농업을 지속 가능한 식량 안보 산업으로 지켜나가는 것임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기후위기, 먹거리 위기, 지방소멸 위기의 해법은 농촌을 살리는 데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지켜온 농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