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 국장일과 상경자 경계, 당진경찰서에서
당진경찰서 합덕 순사 주재소에서는 지난 3일 오후에 돌연히 당지(當地) 소작조합급신합청년회(小作組合及新合靑年會)에 출장하여 이왕전하(李王殿下)의 국장일을 당하여는 절대로 상경을 금지한다하며 청년회 제씨에게는 즉석에서 좌우간의 회답을 요구하는 동시에 금지명령을 발(發)함에도 불구하고 상경한다하면 구속하겠다는 이유로 특히 간부 배기영(裵基英), 정형택(鄭亨澤), 정학원(鄭鶴源) 3씨에게 대하여 주의를 요하였으며 기타 신문기자와 일반회원에게도 상경을 불허한다고... (시대일보 1926년 6월7일)
4일 : 당진 염병 만연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등지와 동군 순성면 봉소리 등지에서 지난 4월 초순경부터 장질부사(장티부스)가 발생되었던 것을 의생의 진찰이 잘못되어 악성 감모(感冒-감기)로 치료하여 오던 바 그것이 차차 만연됨으로 당지 공의의 진찰을 받은 뒤로는 장질부사로 판명되어서 당지 경찰서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예방에 전력한다는 바 발생 시초로부터 약 2개월을 두고 알지 못한 관계로 다수한 환자를 내었다 한다. (조선일보 1930년 6월4일)
7일 : 빈민 호세 대납
충남 당진군 면천 금융조합 이사 한동벽(韓東壁)씨는 급료를 가지고 겨우 생활을 하여 감에도 불구하고 동군 면천면 성상리 극빈자 김순필(金順弼)외 16호는 호구지책도 없는 중 호세의 불납으로 곤란이 막심함으로 불쌍히 여기어 이 17호에 대한 호세 5원 58전을 대납하여 주었다더라. (동아일보 1926년 6월7일)
6·10 만세운동에 대하여
1926년 6월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신 순종께서는 일찍이 4월 26일에 승하하셨다. 제위에 오른지 4년만인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자조와 실의 속에 살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러한 국왕에게 대한 전국민적 애도는 국가없는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유언비어와 불온한 행동을 감시하는 등 철저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번 운동의 구심체는 학생, 청년이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라는 정책에 말려서 국내외 기성세대의 민족운동은 침체되어가는 속에 이제 그 활력소를 학생과 청년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또한 이전의 비조직적인 면에서 벗어나 학생층 전체를 망라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항일학생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서울에서는 약 24,000여명의 학생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전국적으로 파급되어갔다. 그러나 일제의 사전 탄압과 진압으로 범 국민적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민족운동에 활기를 안겨 주었고 3.1운동과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민족운동사의 큰 횃불이 되었던 것이다.
위의 첫번째 기사의 내용도 그와 관련있으며 당진의 청년회에서 참여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자료조사·글 : 김남석(nsk6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