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
당진읍 계성평화빌라
인간은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하는 질문을 받을 때 자기의 현실 위치에서 곧잘 대변해주는 말들이 모두가 종신까지 지켜나갈 듯 선악을 구분하며 남들로부터 지탄받지 않고 정도 위에서 청렴하고 고결하게 살아간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을 포장해서 나열해 놓은 빈약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일부인사).
순리에 역행하면서 처신과 비례치 못한 지위에 도달하면 자량처사로 조자룡 헌칼쓰듯 유유상종하면서 불편한 자들을 가차없이 옥죄어 버리는 그런 자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작태들과 무리지어 오족과 같이 살아간다. 심신이 불편해서 의사를 접하고 누울 때는 그래도 할말은 있다.
평생 정직으로 일관되게 살아왔는데 그 무엇이 나에게 시련을 겪게 한단 말인가 하고 자문자답으로 반추해볼 것이다.
일찍 엽관주의에 밝아 적당한 위치에 오르면 귀족으로 위장하고 일시에 부화뇌동에 편승하여 탁류에 유락하는 광경은 잠시의 쾌거인지는 모르나 후세에 업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임종 때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은 하늘을 동하게 만들고 계절없이 서리가 내리게 하는데, 그 어찌 천필육지(天必戮之)가 아니 오겠는가 말이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대망을 안고 본 고장을 지키며 여생을 선의자들과 지역현안 등 경제발전에 일조코자한 꿈은 일시에 무너졌으니 이젠 비애를 느끼며 한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일찍이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의 병’이라고 갈파했다.
세월이 부족하여 재기는 늦었고 이제는 한과 더불어 그 후세의 업보를 지켜보며 살아가는 것이 낙으로 생각되어 조용히 산천에 묻어두고 세월을 읽을 것이다.
권력은 그것을 횡포라고 부르지 않고 부득이 하다고 변명한다. 순서에 입각해서 논리 정연하게 설명으로 시간을 두고 매사 신중을 기해야 함에도 폭력적인 언어는 지식인의 생명인 논리를 추방하고 말았다.
평생동안 노력하며 살아온 평범한 인간의 작은 족적마저 없애버린 처사에 대해서 천추유한으로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주변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지족수분(知足守分)도 부족해서 인팽(人烹)으로 만들어 놓고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있으니 더욱 분개가 극에 달하고 화통이 끓어 쇠진 단계에 이르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사랑과 존경의 법칙이 있거늘 짐승의 법칙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있으니 먼날 죽음 앞에서는 가을 바람에 쫓기는 낙엽과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것이다.
인도의 간디는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좋은 곳’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분명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사대주의에 물들어 온갖 아첨과 술책 간교로 수단을 구사하여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거짓이 진실인 양 활보하는 속빈 강정들이 철면으로 주야 거닐고 있으니 언제가 조용할런지 한을 안고 세상불출하니 인부지불온(人不知不溫)이면 어떠하랴 역천자필망(逆天者必亡)이라고 공자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