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씨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한 획, 한 글자에 담긴 마음은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상처 난 영혼을 감싸 안기도 한다. 캘리그라피 강은지 작가에게 글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을 새로운 열어 준 시작이자, 자신을 찾게 한 길이었다.
그에게 글씨는 공허했던 시간을 채우는 힘이자,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여정이었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고, 아내와 엄마의 역할로 살아가던 날들 속에서 그는 점점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갔다. 하지만 붓을 들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던 순간, 강 작가는 속에 있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그에게 글씨는, 마음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게 이끌어주는 존재가 됐다.
시와 글을 사랑했던 소녀
어릴 적부터 시와 글을 좋아하던 강은지 작가는 “글을 더 가까이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10여 년 전 캘리그라피를 처음 접했다. 그 역시 결혼과 동시에 경력이 끊기고, 아이를 키우느라 스스로를 돌아볼 틈 없이 살았다. 어느 정도 아이가 컸을 무렵,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다 만난 것이 캘리그라피였다.
강 작가는 당진의 풀잎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 박해옥 캘리그라피 작가를 만나 글씨의 세계로 발을 내딛었고, 이후에 강사 자리까지 이어 받으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누군가에게 글씨를 가르치며, 글씨가 단순히 기술을 넘어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롯데시네마 벽 글씨 작업에 참여
강 작가가 캘리그라피에 더 깊이 있게 배우고 싶다고 느낀 계기는 롯데시네마 벽글씨였다. 당진 롯데시네마 대표와 인연이 있던 지인이, 개관 당시 강 작가가 쓴 글을 선물로 전했다. 그 글씨를 좋게 본 대표가 강 작가에게 영화관 7~9층의 벽을 캘리그라피로 채워달라고 제안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간에, 큰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는 더 호소력 있고, 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이후 서울로 발걸음을 옮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서울에서 열린 가톨릭글씨문화연구회 전시를 보고 그는 “그때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많은 작가와 작품을 만나면서 캘리그라피를 보는 눈이 더 넓어지게 된 그는, 우리나라의 캘리그라피 1호 이상현 작가를 찾아가게 된다. 이상현 작가는 타짜와 해를 품은 달, 일품진로 등 굵직한 작품을 남긴 인물로,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려 있는 거장이다. 그는 이상현 작가를 알게 되면서 캘리그라피에 더 빠져들었다.

다양한 전시에도 참여
캘리그라피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전시에도 참여한 강 작가는 글씨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글사랑본부가 주최한 ‘제주 너영나영전’에서는 사라져가는 제주어 시와 노래를 글로 남겼고, 한국해양과학기술원에서 열린 ‘독도 이야기를 품다’ 전시에서는 독도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다. 홍대 앞 거리에서 한글 깃발을 휘날리며 ‘한글로 물들이다’ 전시에도 참여했다.
의미 있는 전시 중 하나는 수강생과 함께 한 것이다. 2022년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한국일일달력전’은 제자와 함께 처음으로 참여한 대형 전시였다. 그는 “가르치고 있는 수강생과 함께 전시했을 때 벅찬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부엌 식탁에서 채운동의 작업실로
한편, 강 작가의 작업은 오랫동안 집 부엌 식탁에서 이어졌다. 하지만 가족과 공유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없었다. 밥이나 간식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작업은 중단됐다. 또한 그의 작품들이 거실이 쌓일 때마다 마음 한 편이 무거워졌다.
그때 우연한 기회로 작업실 공간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고민이 많았던 그는 결국 한 차례 포기했다. 그는 “지나고 나서 많이 후회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마침 또 공간을 소개 받은 그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고 계약했고, 지금의 작업실이 됐다. 후에 작업실을 확장하게 됐는데, 확장한 공간은 그가 처음에 포기했던 곳이었다. 그는 “‘할까, 말까’ 고민에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지나고 보면 더 긍정적인 결과로 찾아오게 되더라”고 말했다.
이 공간에서 그는 개인 작업은 물론 매주 월, 화, 수요일마다 수강생을 만나며 함께 글을 쓰고 있다.

첫 개인전 ‘그럴 수 있어’
한편 오는 17일부터 28일까지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에서 강은지 작가의 첫 개인전 ‘그럴 수 있어’가 열린다. 제목은 그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일찍이 14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이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가까이 지내던 삼촌과 할머니도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잘 지내다가도 순간순간 허전함은 찾아 왔고, 서러움은 밀려왔다. 누구나 이런 순간을 겪곤 한다. 그때 강 작가가 건네주고 싶은 말이 “그럴 수 있어. 괜찮아”다.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넘어지기도 해요. 또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거나 힘을 잃기도 하고요. 그럴 때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지죠. 그럴 때 해주고 싶은 말이 ‘그럴 수 있어’에요. 힘들어도 끈을 놓지 않으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고 곧 기쁨이 찾아오게 될 거라는 걸 저는 확신하거든요.”
개인전 준비 “많이 긴장돼요”
여러 전시에 참여한 강 작가지만, 첫 개인전은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일이다. 때로는 작품을 준비하며 혼자 이겨내야 하는 순간도 있고, 아무리 늦게까지 작업을 해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날은 고될 때가 있다고. 그럴 때마다 주변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단다.
“둘째 언니가 ‘너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선배와 동료 작가, 수강생과 가족들이 많이 도와줘서 전시회 하기도 전에 마음의 선물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축사를 써주신 14살 때 선생님의 글을 잃으며 괴로웠던 것들이 씻긴 느낌을 받기도 했고요.”
그는 이번 전시에 오는 관객들이 스스로에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건네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싹 트길 바란다”며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한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시회가 스스로에게 울림을 주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