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당진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 고장입니다. 항일 의병이 석문면 소난지도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났고, 대호지면과 정미면 천의리 장터에서는 전 주민이 봉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만주 무장투쟁으로, 상해 임시정부로, 광복군으로 확대되었고, 국내에서는 비밀결사, 학생운동, 농민운동, 사회운동, 청년운동, 신간회 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당진시에는 대통령표창 이상 건국훈장을 수여 받은 독립운동 유공자가 187명에 이릅니다. 이는 충남에서도 홍성군 청양군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는 인원입니다.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애국지사도 50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서훈을 받게 되면 전체 인원은 크게 늘 것입니다. 특별한 곳은 대호지면입니다. 4.4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고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무려 156명에 이릅니다. 대호지면에 가면 집집마다 국기 게양대가 있고 태극기가 휘날립니다. 전남 완도군 소안도가 ‘태극기 섬’이라면, 대호지면은 ‘태극기 마을’ 혹은 ‘태극기 면’입니다. 우리가 독립된 조국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독립유공자들 덕분입니다. 이런 이유로 당진시 독립유공자 열전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한된 기간과 분량 관계로 여러분을 모아서 차례 없이 서술하였습니다. 아울러 각주와 참고문헌은 생략하였고, 존칭도 생략하였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당진시 독립운동가 열전 ① 정미면의 항일의병 김보령, 이일봉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한말 항일의병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뒤이어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체해 버렸다. 이에 해산 군인들은 항일의병에 가담했고 보다 체계적인 의병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른바 1907년의 정미의병이었다.

당진지역 의병들도 이 시기를 즈음해 일제 군경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펼쳐 나갔는데 정미면 출신의 김보령(金保寧)과 이일봉(李日奉)이 대표적이었다. 『판결문(1908)』에 의하면 김보령의 주소는 충남 해미군(海美郡) 염술면(廉述面) 후곡(後谷)이라고 기록됐다. 염술면은 염솔면(鹽率面)의 오기(誤記)이며, ‘후곡’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정미면 천의리의 한 마을로 추정된다. 염솔면은 조선시대 해미군 소속이었으나, 현재 당진시 정미면에 해당한다. 김보령의 직업은 농업이고, 1908년 당시 나이는 36세였다. 이로써 1873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보령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미면 천의리의 모습(현 천의 장터)
김보령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미면 천의리의 모습(현 천의 장터)

이일봉의 주소는 해미군(海美郡) 염술면(廉述面) 승비동(乘非洞)이었다.

‘승비동’은 현재 ‘승비(升飛)’라 하여 정미면 승산리 사거리에 해당한다. 이 사거리는 충장로, 4.4만세로, 서산 방면으로 나뉘는데, 예전부터 주막이 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고, 신분은 상민(常民)이었다. 생년은 알 수 없으나, 1908년 당시 23세였으므로 1886년생으로 추정된다.

그림1 김보령의 『판결원본』(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6일).
그림1 김보령의 『판결원본』(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6일).

김보령과 이일봉은 융희(隆熙) 2년인 1908년 여름, 장석홍(張錫弘)이 이끄는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장석홍은 충남 보령 출신의 의병장으로, 나이는 34세였다. 장석홍은 의병을 30~50명의 소규모로 나눠 당진과 서산, 보령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곳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았다. 이들은 지리적 배경을 활용해 서양식 소총 약 15정과 군도, 전통도검으로 무장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김보령이 일본군에 체포된 곳은 태안의 안면도다. 그는 이홍(李烘) 등과 함께 어느 민가에 들어가 두 곳에서 군수전(軍需錢)이라는 명목으로 10원과 7원을 빼앗았다. 이 사실은 곧바로 남포군(藍浦郡, 현 보령시 남포면) 헌병분견소에 탐지됐고 결국 일본군에 체포됐다. 김보령은 재판에 넘겨졌고, 1908년 9월 1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림2 이일봉의 『판결원본』 (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6일).
그림2 이일봉의 『판결원본』 (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6일).

이일봉도 3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총포와 칼을 휴대하고 일본군과 교전하며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일봉도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1908년 9월 16일, 그는 김보령과 함께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暴動)」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일봉이 성장한 정미면 승산리 승비마을(현재의 정미면 승산리 사거리)
이일봉이 성장한 정미면 승산리 승비마을(현재의 정미면 승산리 사거리)

이일봉은 김보령과 함께 이후의 행적이나, 별세한 시기, 묘소, 유족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판결문』을 통해 인적사항만 남기고, 나라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싸우다가 사라져 간 전형적인 농민 의병(義兵)이다. 원래 당진 분들이 이랬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열전 첫머리에 올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보령의 공훈을 기려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아울러 정부는 이일봉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글쓴이 김남석

계성초, 호서중·고를 졸업하고 충남대 사학과, 동대학원에서 한국사(문학박사)를 공부했다. 호서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정년퇴직하고 현재 면천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