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일의 판결서(1909. 6. 17.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출처:국가기록원)
박우일의 판결서(1909. 6. 17.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출처:국가기록원)

박우일(朴雨日)은 군내면(郡內面) 하우두리(下牛頭里) 출신이다. 현재의 지명은 읍내 3동 우두동(牛頭洞)이다. 1909년 당시 31세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가 의병 활동에 참여한 것은 1906년 5월경이다. 민종식(閔宗植)이 일으킨 홍주(洪州, 현 홍성) 의병에 가담하면서부터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이때부터 의병 전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라가 조만간 식민지로 전락할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홍주 의병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박우일은 민종식의 좌익장으로 서천(舒川)과 남포(藍浦, 현 보령)에서 다량의 총포와 탄약을 모았다. 그는 의병대를 이끌고 친일 군수를 응징하였고,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무찔렀다.

박우일은 의병대를 이끌고 1906년 5월 19일 홍주로 진격하여 홍주성을 장악하였다. 다음 날인 20일, 일본군의 탈환 작전이 전개되자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 3시경 일본군의 기습작전으로 홍주성을 더는 지킬 수 없게 되자, 박우일은 다른 의병들과 함께 탈출하였다.

그 후 박우일은 청양(靑陽)·공주(公州) 등으로 이동하면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그는 1906년 9월 민종식과 함께 이남규(李南珪)의 집에 모여 예산으로 진격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그 지역에 사는 일진회원(一進會員)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박우일은 1907년 2월 부안 내소사(來蘇寺)에서 승려로 숨어지내면서 전라도에서의 의병 활동을 모색하였다. 또한 1909년 2월 박도경(朴道京) 의병부대에 들어가 함평(咸平)·영광(靈光)·고창(高敞) 등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2월 하순에는 의병 3명을 이끌고 함평군 홍동리에서 군자금으로 엽전 400냥을 강탈하였다. 하지만, 박우일은 일본군을 정탐하다가 안타깝게도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박우일은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10년 1월 31일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별세하고 말았다.

심주현의 공주지방재판소 판결(1909.5.28., 출처:국가기록원)
심주현의 공주지방재판소 판결(1909.5.28., 출처:국가기록원)

한편, 심주현(沈周鉉)·최기운(崔基云)·최제성(崔諸成)은 정주원 의병장과 관련한 의병들이다. 이중 심주현은 1872년 당진군 남면 행정리(현 당진 2동 행정동)에서 출생하였다. 신분은 양반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1908년 정주원의 부하인 최종성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9년 5월 외맹면 찬동(현 석문면 삼화리)에서 당진주재소 순사들과 교전 끝에 부상을 당하고 하군배·정선경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1909년 5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기운은 1908년 당시 25세로, 당진군 읍내리 출신이었다. 그는 정주원 의병장의 부하로 1908년 6월경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정주원 의병장이 1908년 7월 일본군에 체포된 이후에도 항쟁을 지속하였고 끝내 행방이 묘연해졌다.

최제성은 백암동(현 당진 2동 채운동) 출신이다. 그는 1908년과 1909년에 당진과 서산, 면천과 해미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 군경에 끝내 붙잡히지 않았고, 행방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홍주 의병 출신인 박우일의 공훈을 기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심주현의 공훈을 기력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지만, 최기운과 최제성은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김남석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