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원(鄭周源) 의병장의 자는 일수(日秀), 호는 송운(松雲)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당진시 고대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정일항(鄭日恒) 어머니 거창 신씨(居昌愼氏) 사이의 넷째 아들로, 1868년 10월 18일(음)에 태어났다. 신분은 양반으로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경성지방재판소의 판결서(1908)에 기록된 주소는 경기도 죽산군(竹山郡) 원삼면(遠三面,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하사리(荷寺里)로 되어 의병 봉기 당시에는 죽산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주원은 고종황제가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되고 대한제국 군인이 강제로 해산된 직후인 1907년 8월 의병 항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서용범(徐用凡) 의병장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였는데, 그의 부장으로 100~150명을 인솔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는 활동을 하였다. 정주원이 이끈 의병부대는 부장, 소대장, 분대장의 정규군 조직을 갖추었다. 이는 그가 대한제국의 지휘관 출신이었거나 아니면, 해산 군인이 그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고, 경기도 죽산ㆍ양지ㆍ수원ㆍ안성 지역과 충남 당진ㆍ면천ㆍ해미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1907년 8월 경기도 안성의 의병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9월 이후에는 죽산과 양지(陽智,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08년 초에는 충청, 경기지역의 연합 의병인 13진 창의소를 조직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1908년 1월 ‘일진회 보아라’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일진회원들이 일본에 붙어 의병을 해치는 행위는 일본인의 꼬임에 빠져 골육상잔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정주원은 의병을 거짓 칭하고 백성의 곡식을 도적질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으며, 면장들에게도 통문을 발표하여 세금을 일본인에게 내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정주원은 1908년 4월, 이번에는 당진으로 건너와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주원은 7월 19일 성환수비대에 의해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되기 전, 호위병을 이끌고 대호지면 적서리 차숙보(車淑輔, 1859~1945)의 집에 숨어 3개월간 살았다고 전한다. 이때 정주원은 적서리 방구바위 산기슭에 있던 당재 강당과 구지정(九芝亭)에 활터와 과녁을 만들어 놓고 마을 장정들을 훈련하였다. 그러던 중 의병 4명이 암호 약속을 잘못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이들이 일본 경찰에 매수당하면서 정주원은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정주원 의병장이 체포된 후, 경기도와 당진지역 의병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항쟁 횟수도 감소되었다.

정주원의병장은 1908년 9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형으로 감해졌고,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출생지인 고대면 용두리와 송악면 가학리에서 거주하였으나, 1925년 1월 22일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숙성리에서 5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는 당진시 송악읍 가학리에 있다. 정주원 의병장은 당진지역 항일 의병사에 있어서 거목(巨木)과도 같은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주원 의병장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