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백(金成伯)은 1908년 당시 26세로 1883년생이다. 주소는 충남 면천군 감천면 창덕리이다. 창덕리는 알 수 없으나, 감천면은 1914년 당진군 송산면 명산리·도문리·무수리로 통합된 지명이다. 직업은 용인이었다.
김성백은 김쌍봉(金雙奉)과 함께 정주원 의병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음 5월에 김쌍봉·신갑순(申甲順)·이용백(李用白) 등 30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해미군 천의면 승비리(현 당진시 정미면 승산리)에서 군자금 명목으로 2백 냥을, 당진군 구루지에서 70냥을 징수하였다. 또한 1908년 음 6월에는 해미군 일도면(현 정미면) 상시평에서 일제의 밀정을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같은 해 8월 홍주경찰서 순사에게 김쌍봉과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김쌍봉은 해미군 부산면 원평리(현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에 살고 있었는데, 1908년 9월 1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형의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함께 붙잡힌 김성백도 김쌍봉과 같이 재판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나 판결문이 없어서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
한편, 최구현(崔九鉉) 의병장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인성(仁成), 호는 유곡(楡谷)이다. 아버지는 승문원 부제조 최영환, 어머니는 광산 김씨다.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영천 전투에서 전사한 충신공(忠信公) 최준립(崔埈立)의 12대 후손으로, 면천군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출생연도는 1866년이다. 1887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벼슬은 군부 참서관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분을 억누를 수 없어 관직을 사임하고, 1906년 송악면 기지시리에 창의도소(倡義都所)를 설치하였다.
그가 의병을 모집하는 창의문을 게시하자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서 370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최구현은 이곳에서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 추대되었고, 의병을 지휘하며 15일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위세를 드높였다.

최구현 의병장은 1906년 5월 의병을 이끌고 면천성을 공격하여 다음 날 새벽까지 일본 경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로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의병 36명을 인솔하여 홍일초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소난지도에 들어갔다.
그는 1906년 6월 홍일초 부대와 함께 면천성을 다시 공격하여 군수 이교영(李喬永)을 포박하고 이속(吏屬)을 난타하여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했다. 또한 1906년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거듭되는 최구현 의병부대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일본 경찰대는 1906년 8월 의병의 본거지인 소난지도를 급습해 최구현을 체포했다. 그는 면천에 끌려와 일본 수비대의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1906년 음력 12월 23일 자택에서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최구현의 행적은 100년 가까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후 2003년 9월 17일 새벽, 손자 최충묵이 꿈을 꾸었는데 갓과 도포를 입은 한 선비가 나타나 ‘문패를 놓고 왔으니 가서 찾아오라’라고 하였다. 이에 손자는 이장하기 전의 송산면 무수리에 있던 조부 묘소를 팠더니 석고로 제작한 묘지석이 나왔다. 이 묘지석에 새겨진 묘지문에 의하여 최구현 의병장의 의병 사실 전모가 확인되었다. 묘소는 현재 송산면 부곡리 산 157번지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구현의병장의 공훈을 기려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서산시 출신의 김쌍봉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김성백에게는 아직 건국훈장이 수여되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