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곧이어 대한제국의 법령제정권·행정권·관리임명권 등을 강탈하였으며,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해산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의병 전쟁으로 확대하였다.

박계문(朴桂文)과 도중삼(都仲三)은 당진시 송악읍 출신의 항일의병이다. 박계문의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평리원 판결문(1907)에 44세로 기록되어 186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주소는 면천군(沔川郡) 기지시(機池市)이다. 기지시리는 조선시대 면천군 승선면(昇仙面)에 속했는데,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과정에서 당진군 송악면으로 변경되었고 면 소재지가 되었다. 지금도 기지시리는 송악읍의 가장 번화한 마을로 바뀌었다.
도중삼은 187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29세인 1907년 11월 17일에 순국한 의병이다. 그의 주소는 면천군 승선면 가재동(佳才洞)이었다. 가재동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악면 가교리(佳橋里)가 된 마을이다.

박계문은 원래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7년 9월 초,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상경하였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김천복(金千福)의 부모에게서 아들을 데리고 내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천복은 근위대 병사로 근무하였는데,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건축 공사장에서 막노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근위대에서 함께 근무하였던 해산 군인 김태선(金泰先), 김영근(金永根) 등을 만나 의병부대 합류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일제 경찰에 탐지되었고 서울 종로 수진궁동(壽進宮洞, 현 서울 종로구청 부근)에서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박계문은“9월 초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으며, 김천복(金千福)의 부모로부터 아들을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천복을 설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머물고 있었다”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의병에 합류하기로 의논한 증거가 명백하여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 결과 박계문은 1907년 11월 30일 평리원에서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해서 난을 일으킨’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流刑) 5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도중삼은 의병 전쟁이 한창이던 1907년 10월 이경칠(李敬七)의 권유를 받고 경기도 수원(水原) 일대에서 활동하던 정정현(鄭定鉉)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0월 9일 의병 55명과 함께 수원에서 출발, 배를 이용하여 송악면 한진리 포구에 들어왔다. 이어 당진분파소(唐津分派所)를 습격하는 작전에 참여하였고, 당진군 군내면 북창(北倉, 현 당진시 채운동)을 거쳐 수원군 안중리(현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안중리)로 돌아갔다.

그후 도중삼은 우강면 일대에서 의병 모집을 위해 애쓰던 중, 남원포(南元浦, 현 우강면 부장리)에서 당진과 면천분파소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1907년 11월 17일 홍주분견소(洪州分遣所)로 압송되어 가던 중, 면천군 마산면(馬山面)의 산속에서 포승줄을 끊고 탈출하다가 격투 끝에 희생되고 말았다. 마산면은 현재의 면천면 대치리 율사리 자개리에 해당한다. 한편, 도중삼이 사망하자 의병들은 11월 22일 면천주재소를 공격하였고 주재소 건물과 우편취급소를 불태웠다. 의병의 보복 공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계문의 공훈을 기려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도중삼에게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