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진시 출신의 항일 의병으로 이름 석 자만 남긴 이도 여러분이나 된다. 이들은 대부분의 항일 의병이 그랬듯이 자세한 거주지나 나이, 직업 등 개인의 인적 사항을 남기지 못했다. 이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들풀과도 같은’, ‘민초(民草) 의병’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신경춘 의병장, 신기석 의병장, 최종성 의병장 등이 있다.
신경춘(申京春)은 당진시 출신의 의병장으로, 한자가 다른 이름으로는 신경춘(申敬春)을 썼다. 그가 일제 군경과 싸운 시기는 1908년이었다. 그는 정주원 의병부대와 달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는데,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서산ㆍ당진ㆍ태안ㆍ덕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신경춘 의병부대는 1908년 12월 15일 해미의 염솔면 성산리(현 당진시 정미면 산성리) 박응진 외 2명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다음 날인 12월 16일에도 해미군 이도면(현 서산시 운산면)의 이도면장 유진오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하지만, 이 모금 활동은 곧바로 일제 경찰에 탐지되었다.
일제 경찰은 군자금 모금을 이유로 서산의 동음암면 동음암리(현 서산시 음암면)에서 의병 윤성팔(尹聖八)을 체포하였다. 윤성팔은 신경춘 의병부대의 부대원으로 당시 서산군 성연면 마명리(현 성연면 명천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박선명(朴善明)도 신경춘 의병부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경기도 남양 출신으로 대부도에서 활동하였는데 1908년 8월경 의병 20여 명과 함께 당진군 도리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박선명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09년 12월 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신경춘 의병장은 일제 군경에 붙잡힌 사실이 없고, 자세한 행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기석(申基錫)도 당진시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서산시 성연면 출신인 엄주동(嚴柱銅) 외 23명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당진과 서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신기석은 1908년 음 8월 당진군 고산동(현 고대면 당진포리)에 있는 유(柳)모의 집에서 군자금으로 10원을 모금하였고, 같은 달 해미군 서면 이룡동(현 대호지면)에 들어가 김(金)모로부터 12원을 모금하였다. 또한 대산면 반곡리(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에서 쌀 2말을 징수하였다.
그는 1908년 10월 의병 약 30여 명을 이끌고 서산군 독곶(獨串) 지역을 통과하였는데, 이곳은 면천에서 서쪽으로 약 90리에 해당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군의 추격으로 붙잡히고 말았는데, 1909년 5월 31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최종성(崔鍾成)의 인적 사항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제의 정보 보고서에 의하면, ‘최종성은 당진 출신이며, 직업은 농업이다. 1908~9년에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진·서산·해미·홍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는 고대면 출신의 정주원 의병장의 부하 장수로도 알려져 있다.

최종성은 당진 출신인 하군배(河君輩)·정선경(鄭善京)·심주현(沈周鉉) 등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1908년 5월 당진주재소를 공격하여 순사 유희령을 처단하였다. 또한 1908년 7월 정주원 의병장이 일본군에 붙잡힌 이후에도, 1909년까지 항쟁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신경춘 의병장과 신기석 의병장, 그리고 최종성 의병장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의 항일 의병과 함께 ‘들풀처럼’,‘바람처럼’, 가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 간 전형적인 우리 의병(義兵)의 모습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