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중 판결문(경성공소원, 1909년 12월 21일, 출처:국가기록원)
신순중 판결문(경성공소원, 1909년 12월 21일, 출처:국가기록원)

김낙삼(金洛三)은 1908년 당시 32세로, 출신지는 상대면 중흥리로 지금의 고대면 항곡리였다. 손성오(孫聖伍)는 나이를 알 수 없고, 하대면 용두리에서 거주하였다. 한편, 손응현(孫應鉉)은 1880년 8월 6일 태어났는데, 1908년 당시로는 29세였다. 출신지는 하대면 당산리인데 현재 고대면 용두리이다. 신순중(申舜重)은 1909년 당시 26세로, 하대면 용두리 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항일의병장 정주원(鄭周源, 1868~1925)의 부하들이었다. 정주원의 의병 항쟁은 1907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정주원 의병대는 대한제국의 군대 편성 체제를 적용하였는데, 손성오가 부장(副將)으로, 신순중이 분대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소대장은 태안군 출신의 이상덕(李相德)이 맡았다. 김낙삼과 손응현의 보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손응현 판결문(경성공소원, 1910년 4월 19일, 출처:국가기록원)
손응현 판결문(경성공소원, 1910년 4월 19일, 출처:국가기록원)

정주원의병부대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일제 군경과 싸웠다. 이들은 정주원 의병장의 핵심 의병으로 최일선에서 일제의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항전하였다. 이들은 1908년 3월 죽산군 원삼면 능촌에서 숙영하는 일본군 이천수비대와 경찰대를 공격하였고, 4월에는 양지군 사동과 용인군 요봉골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격렬한 전쟁을 치르던 이들은 4월 25일 아산만을 건너 당진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6월 15일 서산의 동음암면(현 서산시 음암면) 송내리에서 일본인 체신부를 죽이고 이어서 당진군 읍내로 진격하여 17일 당진군 관아를 점령하였다. 정주원은 1908년 7월 19일 대호지면 적서리에서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었는데, 손성오는 그때까지 정주원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맞서 항전하였다.

한편, 김낙삼은 이들에 비하여 일찍 일제 군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08년 5월 2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당진 읍내를 공격하였고, 당진주재소를 방화·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08년 6월 김낙삼은 당진주재소의 순사에게 붙잡혔고, 재판도 없이 당진 읍내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손응현은 1908년 1월, 당진군 하대면 석동(石洞, 현 용두리)에서 물자를 탈취하였고, 3월에는 서산군 동암면(현 서산시 음암면)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일로 그는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1910년 3월 28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4월 19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정주원의병대의 분대장인 신순중은 1908년 5월 의병 수명과 함께 해미군 서면 사기소리(沙器所里, 현 대호지면 사성리)에서 군자금 명목으로 4원을 징수하였다. 그는 1908년 11월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1909년 1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09년 12월 21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낙삼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손응현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지만, 손성오는 일본군에 체포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병 전쟁 과정에서 행방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 신순중도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김남석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