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재 원당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
박두재 원당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

며칠 전 한 장의 음악 LP를 꺼내 들었다. 반젤리스(Vangelis)의 <Conquest of Paradise>라는 곡이었다. 웅장하고 장대한 이 곡은 영화 <1492: Conquest of Paradise>의 주제곡으로, 유럽의 탐험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배경으로 한다.

‘낙원의 정복’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이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492년 유럽인들에게 그 땅은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었지만, 이미 그곳에서 살아가던 원주민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자 삶의 붕괴였다.

우리는 종종 ‘만남’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어떤 만남은 기회가 되었지만, 또 어떤 만남은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 비극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가 과연 우리와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낙원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정복과 배제는 여전히 다른 얼굴로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한 도시의 개발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도 드러난다. 정의와 자유, 국제 질서를 말하지만 그 언어의 이면에서는 힘의 논리가 앞서는 순간들이 끊이지 않는다.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오면 도시화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람들은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곳에 살던 어르신들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디지털 세상은 더욱 빠르고 편리해졌지만, 그 편리함은 어떤 이들에게 또 하나의 국경이자 넘기 어려운 장벽이 되었다.

새로운 제도나 정책은 누군가에게 더 큰 성취의 사다리가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따라가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현실을 전혀 다른 시대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일상적인 말 한 마디와 사소한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 하루를 버텨낼 위로가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침범당하는 무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감과 경청 없이 돕는다는 이름으로 다가가는 만남은 때로 또 하나의 ‘정복’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에도 힘 있는 자의 자리가 아니라 힘없는 이들의 곁을 택했다. 낮은 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고 병든 자의 손을 잡았으며 죄인의 집에도 서슴없이 머물렀다. 예수는 사람을 정복하거나 훈계하기 위해 오지 않았다. 함께 걷기 위해 왔다. 그의 만남은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동행이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직장이나 가정, 그리고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만남 자체가 부담이 아니라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조심과 존중을 요구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방식 하나, 그 앞에 서는 태도 하나는 그 사람에게 하루를 살아낼 힘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사람의 ‘낙원’을 무너뜨리는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해 본다.

“내 말과 마음이 누군가의 세계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