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가 1913년 4월 남중희에게서 토지를 강제 기부받고 1918년 3월에 지급한 감사문
조선총독부가 1913년 4월 남중희에게서 토지를 강제 기부받고 1918년 3월에 지급한 감사문

대호지면 장정리는 정미면 소재지인 천의리에서 대호지면 소재지인 조금리까지의 도롯가에 있다. 조선시대 해미군 서면에 속했던 이곳에는 정곡리(井谷里), 상장지리(上長旨里), 하장지리(下長旨里), 경치리(景峙里) 등 4개 마을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를 식민지로 억압하면서 1914년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장지(長旨)’와 ‘정곡(井谷)’에서 한 글자씩 따서 ‘장정리(長井里)’를 만들었다. 이것을 『대호지면지(2002)』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길고(長), 윗말에 항상 마르지 않는 우물(井)이 있어 장정리(長井里)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장정리의 마을이 길다’라는 의미는 647번 지방도를 길게 감싸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도로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다. 현 대호지농협 남기찬 조합장이 2019년에 발표한 「대호지ㆍ천의장터 4ㆍ4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변천 과정」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도로는 1913년에 착수하여 6년간의 공사 끝에 1918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도로 개설과정에서 일제는 주민에게서 토지를 강제 기부(수탈)받았고, 긴 기간 동안 부역에도 동원하였다. 기존 도로는 6자(180㎝) 오솔길로 상당히 굽어 있었다. 이를 일제는 ‘말이 끄는 일본 야포 2대가 동시에 건너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다리와 넓은 길’을 만들겠다고 곧게 펴고 넓게 다지며 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신작로’라고 불렀는데, 토지를 강제 기부 당한 주민의 원성도 상대적으로 높았다.(신작로의 어원은 정조의 수원능행 과정에 있었다고 함)

장정리 마을회관의 현재 모습
장정리 마을회관의 현재 모습

신작로 보수로 위장한 4·4 만세운동

1919년 4월 초,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도호의숙 출신 유생들과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비밀 논의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어떻게 하면 많은 주민을 만세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였다. 『서산군지(1926)』에 의하면, 당시 대호지에는 849호에 세대수는 862세대였다. 남자는 2,402명, 여자는 2,255명, 합계 4,657명이 살고 있었다. 적어도 500명 이상은 참가해야만 했다. 논의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주민을 도로보수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세운동 추진 세력은 4월 3일에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件)」이라는 문서에 이인정 면장의 직인을 찍어 9개 마을 이장들에게 내주었다. 면내 주민은 농기구를 지참하고 도로를 보수하고 아울러 가로수를 정비하라는 면장의 지시였다. 그 도로가 바로 장정리에 만들어진 새로운 도로였다. 거사 일은 천의 장날이 열리는 4월 4일(음력 3월 4일)로 정했다. 당시 천의장은 오일장으로, 음력 4일과 9일에 열리고 있었다.

1919년 4월 4일, 장정리 구장(이장) 정원우(鄭元愚)는 아침부터 서두르고 있었다. 적어도 집마다 1명씩을 동원하여 마을 안에 있는 도로를 보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정리에도 만세운동의 비밀 연락책임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도로 옆에 살고 있던 최연식(崔連植)이었다. 이윽고 해가 중천을 향해 오를 무렵, 조금리 방향에서 수백여 명의 시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연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정원우 구장과 최연식은 장정리 주민과 함께 시위대에 합세하였고, 천의장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빼앗으려던 일본 경찰을 돌을 던져 무찔렀고, 천의주재소를 파괴하여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의 하루를 만끽하였다. 하지만, 서산과 홍성에서 출동한 헌병대가 다가왔고, 무자비한 억압을 예고하고 있었다.

대호지면 장정리 주민으로 창의사에 위패를 봉안한 분은 모두 45명이었다. 이 가운데 『판결문』이나 『형사사건부』, 그리고 『수형인명부(범죄인명부)』에 이름을 올린 분은 12명이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분이 김찬룡(金燦龍, 1990) 1명이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은 분은 김봉국(金鳳國, 1995), 김인식(金仁植, 1995), 김홍균(金洪均, 2022), 유동렬(柳東烈, 1995), 이상영(李象永, 1995), 정상봉(鄭相鳳, 2021), 정재기(鄭在麒, 2021), 조정식(趙庭植, 1995), 조회식(趙會植, 1995), 최연식(崔連植, 1995) 등 10명이다. 하지만,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분이 1분인데, 바로 구장을 지낸 정원우(鄭元愚)다. 당시 대호지면의 9개 마을 구장은 형벌을 받지 않았지만, 만세운동 전개의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분들이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선두에서 돌 던진 애국지사 김찬룡

장정리의 애국지사 중 주목되는 분은 김찬룡이다. 그는 1896년 5월 20일 장정리 484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부안인데, 이들은 장정리와 두산리 일대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형인명부의 기록에 의하면, 족칭(族稱, 신분)이 ‘양반’이고, 직업은 ‘농업’이라 하였다.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천의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이때 천의주재소와 당진경찰서에서 지원 나온 일본 경찰이 군중에 발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시위 행동대를 이끌고 돌을 던져 경찰을 물리쳤고, 천의주재소에 돌진하여 각종 기물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천의주재소 남쪽 약 10칸 정도 거리에 있는 밭에서 큰 배(梨) 정도의 돌을 주워 주재소를 향해 투척한 일이 특별히 판결문에 기록되었다.

만세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의해 「보안법」 위반 및 「소요」로 체포되었고, 재판에 넘겨졌다. 그 결과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보안법」 위반 및 「소요」, 「출판법」 위반, 「공문서위조행사」로 ‘공소 기각’을 선고받고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50년 7월 20일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태형 90대… 가족이 함께 감내한 고통

일본 헌병대의 만세운동 참여자에 대한 억압은 장정리 주민들에게 특히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신작로가 장정리의 한가운데 있었기에, 주민은 헌병대의 탄압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산경찰서로 끌려갔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정도가 약한 주민은 ‘태 90’을 받았다. 그리고 주동자로 인정된 주민은 공주지방법원에 넘겨졌다. ‘태 90’은 태형(笞刑)으로, 사람의 둔부(볼기)를 90대나 때린다는 뜻이다. 형벌이 너무 잔혹하여 태형을 받은 사람은 걷지 못하고, 들것이나 우마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갔다. 환자는 장독(杖毒)이라 하여 몸이 붓고 고열에 시달렸다.

약이 없던 시절, 장독을 내리는 민간요법은 변소(화장실)에 고인 물을 먹는 것이었다. 대호지면에 사셨던 애국지사의 유족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태형을 받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피부가 터지고 곪아 움직이지 못하셨다. 아무것도 없고 무지했던 시절이었기에, 아버지는 장독을 내리기 위해 분뇨 물을 드시곤 하셨다. 나는 변소에 가서 오줌 바가지로 물을 떠서 그릇에 담아 들고 손에 닿을까 옷에 묻을까 조심조심하면서 아버지께 올렸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힘없이 미소 지으시며 “괜찮단다. 먹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라고 하셨다.’ 현대의학이 미치지 못했던 시절, 한 많던 일제강점기의 어둠은 이들 부녀의 고통스러운 대화와 함께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가족의 아픔과 희생도 독립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