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같이 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추억에 젖어들게 된다.
진한 커피 한잔에 미운 네살 딸아이 고집과 생떼로 신경전을 벌이던 일도 잊고, 오늘 저녁 반찬을 무얼할까하는 시름도 잊어 본다.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여름과 비를 얘기한다.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비, 그리운 이름하나 떠오르게 하는 비, 옷장 깊숙히 넣어두었던 옷을 꺼내 잘 다듬어진 햇살에 말려 다시 넣어두듯 우리가슴 깊숙히 간직했던 추억을 꺼내 향수에 젖게하다가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비, 한마디로 바쁜 일상에 여유를 심어주는 비가 아닌가 싶다.
내리던 비가 멈췄다. 학원 마치고 돌아올 딸아이 마중도 할겸 집을 나섰다. 딸아이 손을 잡고 집과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잠깐 걸어나가니 비에 씻긴 푸르고 싱싱한 자연이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밭에는 고추가 주렁주렁, 들깨꽃이 수줍은듯 피어있고, 콩밭도 보인다.
이렇게 좋은 것을... 오던 길을 되돌아 본다. 빽빽하게 자리한 회색의 건물들,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살아도 만끽할 수 있는 자연을 아주 가까이서 외면하고 살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게 된다.
그때 딸아이가 “엄마, 냄새 더러워” 말하고 있었다. 저만큼 소우리가 있었다. 소우리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소똥 냄새. 평상시라면 인상 찡그리며 코부터 움켜잡았을 텐데 오늘은 웬지 그 냄새가 정겹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는데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두번째 듣는 저 소리. 오늘같이 비 내리는 날에 좀더 여유를 가지고 운전했더라면 저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까움이다.
비와 여유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집을 향해 걷는 우리의 머리위로 빗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