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대호지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도 84년이 되었고 4·4 독립만세 기념식과 만세재현행사를 추진한 지도 금년들어 14회를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 당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남주원·이두하·남계창·남상직·남상탁씨는 우리 고장에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을 다짐하면서 대호지에 귀향, 1차적으로 면직원 중심의 결의와 2차적으로 지역유지의 규합으로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천의장날(4·4)을 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한 것이 오늘에 대호지 4·4 독립만세운동의 동기가 된 것이다.
1. 대호지 4·4 독립만세운동
①독립만세운동대회 개최와 시위행진
파고다공원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한달여 만인 1919년 4월4일 9시 대호지면사무소 광장에서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도로보수를 위장한 면민 600여 명이 집결, 긴장과 흥분 속에 역사적인 대한독립만세운동이 대호지에서 거행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운 면장(이인정)과 행동총책(송재만)이 앞장서 비폭력 평화적 시위로 나라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은 시위대열이 대호지 광장을 출발, 도로변에 대기중인 면민과 합세해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②천의장터 만세운동
대호지광장을 출발한 600여 시위대는 천의시장에 모여있던 군중과 합류, 10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이며 남주원, 이태하, 한운석의 독립운동 연설로 열기를 북돋워 천의장터는 독립만세운동의 도가니가 되어 오후 4시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당진경찰서 일경순사(다가시마)가 권총을 발사, 4명이 부상을 당하니 평화적, 비폭력 시위대는 일시에 석전으로 대응하며 폭력투쟁으로 돌변하는 크나큰 사건으로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천의 왜경주재소가 파괴되고 일경순사가 생포되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니 군중은 한순간일지라도 독립만세운동의 쾌거를 부르게 되었다.
2. 봉화·횃불시위
대호지와 천의장터 만세운동의 화합과 호응을 신호로 4월 4일 밤 당진읍을 비롯해서 면천면에서 10개 부락, 순성면에서 10개 부락이 일제히 산에 올라가 봉화와 횃불시위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시위가 계속되니 군일원에 독립만세운동의 확산을 가져오게 한 4·4 독립만세운동인 것이다.
3. 제2차 대호지, 정미면 만세운동
천의장터에서 일경과 충돌, 극렬한 독립만세운동을 한 이후 대호지와 정미에서 재봉기를 약속하고 4월 8일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단행했다.
대호지면에서는 6시경 송전리에서 300여 명과 7시경 조금리에서 300여 명이 참가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고 정미면에서도 수당리와 여미리에서 밤 10시경 300여 명이 횃불시위로 일제에 항거표시를 한 것이다.
4. 군일원의 독립만세 운동
대호지, 정미면의 4월 4일 만세운동을 전후해서 △면천면민시위(4·2) △순성면민 2일간 횃불시위(4·2∼3)가 벌어졌고 △합덕독립만세운동(4·2)은 면천면민과 합세, 수천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가 하면 △송악면 독립만세운동(4·5)은 면사무소를 불을 지르려다 계획의 탈로로 혐의자 8명이 체포를 당하기도 했다.
특히 면천보통학교 학생 200명이 태극기와 플랭카드를 앞세우고 독립만세 시위를 하다가 일경의 제지로 해산(3·10)당한 일들은 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학생운동이다.
이와같은 당진군 지역의 3·1운동사를 기리기 위하여 애국선열 579명의 위패를 대호지 장의사에 봉안,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 천의일경 주재소 자리에 4·4 독립기념탑을 건립, 시위재현행사와 함께 각 읍면단위에서 추진된 독립운동시위를 종합해 4월4일 저녁 봉화, 횃불시위를 당진군 소재지에서 대호지 4·4 독립만세운동의 독립정신을 재현하고 있다. 군민의 성원과 동참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사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