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으로 가득한 하늘입니다. 이런 날이면 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회색은 우울하고 외롭고 어두움을 표현한다는데 나는 이렇게 눈 내리는 회색하늘이 늘 그립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하늘을 푸근한 회색하늘이라고 이름 지어 부릅니다.

이렇게 눈이 오시는 날이면 내리는 눈과 그 하늘은 나에게 평화를 줍니다. 눈이 오면 삶의 어려움이 이 세상에 널리는데도 한 끼쯤 굶는다 해도 기껍게 강아지처럼 눈 내리는 들판을, 거리를 내달리고도 싶습니다.

회색빛 하늘에서 조용히 내리는 세설(細雪)이라면 더 좋습니다. 눈보라 없이 조용히 내리는 눈이라서 인지도 모릅니다. 함박눈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싸락눈만 아니라면 떡을 만들려고 쌀을 빻아 곱게 채로 친 하얀 쌀가루 같은 눈의 모습이 내 마음에는 가장 듭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런 눈이 눈보라도 없이 창 밖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때이면 내 마음에는 시름이 없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무척 생활 방법이 간편해졌습니다. 그 까닭으로 삶에 낭만과 여유로움은 덜 하지만 찻물 끓이기는 편해졌습니다. 전기포트의 물 끓는 소리로는 난로 위에서 끓는 여음(餘音)의 낭만을 대신 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이만큼이라도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 있어서 기쁩니다. 편리와 신속으로 삶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빼앗긴 것이 가끔은 서글프기는 해도 그나마 아직도 이만큼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음이 다행입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벗이 있습니다. 차 한잔 하자고 전화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그가 도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관 창을 통해서 발을 구르면서 눈을 털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보입니다. 끓일 차가 집에 없는 것도 아닌데 이런 날이면 우리는 함께 나누어야 하는 대화의 아름다움으로 이렇게 만납니다.

친구를 위해 마련한 차의 은은한 향을 찬미하면서 시작한 대화는 어느덧 더러운 정치에 분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둘이는 약속이나 한 듯 화들짝 놀랍니다. 이 세상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우리들의 순간이 무너지는 아쉬움 때문이지요.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부를 친구가 없습니다. 이렇게 투병(鬪病)하고 있는 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갔거든요.

※학부에서는 수의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체외 수정을 연구했다. 일본 북해도 낙농학원대학에서 전자 현미경으로 생식세포의 단계별 변화를 연구했다. 당진에서 동물병원을 개설 운영하였고 당진축협배합사료공장장을 맡기도 했다. 국내 유전자변형연구에 참여했고 국립공주문화대학 애완동물과와 공주대학 특수동물학과에서 10년 넘게 강의를 했다.

말기 폐암으로 1개월의 생존을 선고 받고 하루 하루를 이어 가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30년을 넘게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학래산방(鶴來山房)에서 살다가 지금은 경기 안양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여기에 싣는 글들은 투병생활 중 그가 틈틈이 써온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