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11월 무렵부터 문득문득 두 아들놈이 물어왔다. “엄마, 겨울방학이 언제예요?”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실컷 놀고 싶어서요”한다. 아이들을 제법 잘 놀리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흠칫 놀랄 수밖에. 속으로 살짝 어이없어 한다. ‘그제도 놀고 어제도 놀고 지금도 놀고 있으면서 뭘 더 실컷 놀아?’
아이들은 늘 놀고프다. 학기 중에 노는 건 ‘실컷’ 노는 축에 끼지도 않나 보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그 짬을 타서 놀아야 하니 ‘노는 게 노는 게’ 아닌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처럼 바쁘지 않았던 우리들도 얼마나 방학을 기다렸던가.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놓고 설레고 흐뭇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배움을 잠시 놓으라’고 주어진 방학(放學)은 우리들이 놀기에도 딱 맞는 멋진 계절 속에 있다. 들로 산으로 마을 골목길로 누비고 다니며 진땀에 흠뻑 젖도록 놀다가 시원한 물 속에서 몸을 식히는 즐거움, 동네 아이들 모두 우루루 패를 갈라 눈싸움 하고 눈썰매 타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고구마 먹으며 몸을 녹이던 즐거움. 방학 내내 실컷 누린 놀이와 휴식에서 얻은 에너지로 우리는 다음 학기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저명한 교육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힘주어 말하는 것 중 하나가 ‘게으름과 지루함 속에서 배운 바를 되새기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힘이 피어난다’는 사실이다. 방학이 다가오면서 우리 주변엔 학기 중과는 또 다른 정보들이 넘실거린다. 이번 방학이야말로 아이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학원에서 부족한 과목을 보충해야한다든가, 이러저러한 캠프를 통해서 바람직한 습관과 성정을 길러주어야 한다든가 하는 얘기들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가 돈만 준비한다면 이 과정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들이 대신해 준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도 잘 믿어지지 않거니와, 만에 하나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시간을 우리가 마음대로 가져올 권리는 없다. 만약 우리가 수다를 떨거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길 시간을 갖지 못하고 주어진 일만 계속해야 한다면 어떨까?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이 지금 아이들처럼 직장 갔다 와서 승진에 필요한 공부를 가르쳐주는 학원에 가야 하고, 집에 오면 직장 학원 숙제하느라 정신없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우리 어른들은 견딜 수 있을까? 휴가라며 공식적으로 주어진 시간에조차 밀린 공부를 하거나 보고서를 위해 체험을 다녀오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직장에 다시 출근해야 한다면 참을 수 있을까?
우리가 방학동안 만이라도 우리의 기대와 불안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놓아 준다면 아이들은몸과 마음을 충분히 이완시키며 그 시간을 재충전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물론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간 자유를 누려 보지 못한 아이들은 이렇게 시간이 주어질 경우 컴퓨터나 게임에 매달려 우리를 한층 불안하고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땐 우리 어른들이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 마음을 열고 아이를 잘 들여다보면 쉽고 간편한데다 돈도 들지 않는 방법이 천지다. 게다가 아이한테서 “엄마, 사랑해요”라는 고백마저 들을 지도 모른다.
나는 우선 방학이 되면 아이들과 맘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절대로 눈뜨자마자 이불 개지 않고 최소한 30분 정도 서로의 몸을 비벼대며 밍기적거리기, 아이들이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밥상 차려 달라고 졸라보기, 가위 바위 보로 심부름 시켜먹기, 사진첩 보면서 이야기 나누기, 욕조 안에 이불 쌓아놓고 목욕도 하면서 이불도 빠는 기쁨 맛보게 하기(이거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자전거 타고 동네돌기, 장날 시장 가서 좋아하는 거 하나씩 사들고 오기, 동네 맛집 찾아다니며 명함모아 평가서 만들어 보기, 친구집 돌아가며 잠자기, 못마땅한 사람 찝어서 흉보는 거 돌아가면서 하기 등등.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 가득이다. 이번 방학엔 한 번 용기를 내 보자. 온전한 휴식이야말로 우리를 도약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