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당진에 머물고 있지만 내 집은 서울이다.

원룸을 얻어 먹고 자고 있으니 사실 당진이 집이지만 우리는 가족과 더불어 누리는 공간을 ‘집’이라고 쓰고 있다.

집이 서울이지만 나는 본래 경상도 사람이다.

나이 오십에 당진을 찾아 들었다.

나고 자란 땅에서 한 생을 다 보내는 나무처럼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한 논 한 밭에서 난 곡식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아들의 이야기가 피고 지던 시절에 머무는 것은 ‘살다’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생은 짧고 그래서 우리 생은 잠시 머무는 것이지만 한 땅에 오롯이 생을 묶어 두었으니 ‘사는’ 것이다.

‘살다’는 ‘머무르다’의 일정한 지속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인류의 생이 끝없는 여행에서 비롯되었듯이 떠도는 것도 인생이다.

보헤미안처럼 제 발로 떠돌고 집시처럼 운명으로 떠돌고 머물러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떠도는 생이 있다.

가난에 밀려 떠돌고 박해를 떠나 떠돌고 더 나은 생을 쫒아 떠돈다.

그래서 본관, 본향, 관향, 고향은 우리가 새겨 놓은 오랜 발자국이다.

서울서 태어나 황해도 땅에 살던 연암 박지원 선생도 그 시대의 떠돌이였다.

연행(燕行)은 압축적인 떠돌이 길이었다.

이 길에서 우리 문학사에 가장 아름다운 여행기가 태어났다.

김정희 선생도 혹독한 떠돌이 인생이었다.

그의 손에서 이룩된 우리 예술사의 탁월한 성취는 대부분 떠돌이 유배지에서 탄생되었다.

이곳 당진군 면천면, 예산의 용궁리 불과 수 십리 길을 사이에 두고 이 두 위대한 떠돌이의 자취가 묘하게 마주치고 있다.

당진에는 유난히 원룸이 많이 보인다.

원룸은 여관과 주택의 중간 쯤 되는 주거형태로 생각된다.

불안정은 창조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