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구름 사이로 해가 빠금히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송악 부곡1리 경로당에 어르신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오늘처럼 비라도 종일 내리는 날이면 가마 짜는 게 일이었지~”
“어디, 비오는 날에만 짰는가. 여름밤에는 모기향 피워 놓고 12시까지 가마를 짰었어~”
“어디봐~ 잉~ 이 양반이 이날 1등을 했었어~ 박수복 씨!”
빙 둘러 앉은 어르신들 가운데에 귀퉁이가 헤진 흑백 사진 서너장이 놓여 있다. 해방 직후 찍었다는 사진 속에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과 흰 바지저고리에 검은 조끼를 입은 남정네들이 줄지어 앉아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초가집 아래에 모인 구경꾼들 사이에는 까까머리 아이들부터 총을 어깨에 멘 당시 ‘순사’들도 보인다.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 농촌에서 가마는 곡식부터 소금까지 다양한 물건을 담는 생활필수품이었단다. 쌀가마와 벼가마가 따로 있고 비료도 가마에 담아 썼단다. 비닐이 흔치 않던 해방 직후에는 마을에서 가마 짜기 대회를 열어 상을 줄 정도였다고. 첫 번째 사진은 부곡리 마을 가마짜기 대회 모습이다. 사진 속 맨 마지막에 앉아 가마를 짜고 있는 고 박수복 씨가 우승을 차지했다고. 두 번째 사진은 가마 짜기 대회를 마치고 시상을 하는 모습으로 빛바랜 사진을 잘 들여다보면 맨 앞에서 고 박수복 씨 내외가 상을 받고 있다. 당시 20대였던 부곡1리 어르신들(사진 5)은 어제 일을 이야기하듯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윤석주(사진 5 가운데) 씨는 “해방 후 3~4년쯤 됐을 때의 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70년 전쯤 일 것”이라며 “마을의 큰 잔치였던 가마짜기 대회에 면장도 오고 경찰서 기지시지서장도 왔었다”고 회상했다.
주민마다 할당 받은 가마를 각자 집에서 짜서 공판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 할당받은 만큼 가마를 짜지 못한 사람은 가마를 잘 짜는 이웃에게 품삯을 주고 대신 짜다가 내기도 했단다.
“옛날에는 그릇도 귀하고 비닐 포대 같은 것도 없었으니께. 요즘 젊은 애들은 가마가 뭔지도 모를껴. 하지만 그때는 꼭 필요한 거였어. 가마를 잘 못 짜면 쌀이 한 말은 줄기도 했지. 쌀 파는 이가 남겨 먹으려고 일부러 짚을 두툼하게 넣어서 가마 무게를 늘이는 일도 있었어~”
무료했던 경로당이 옛날 사진 몇 장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집 정돈을 하던 김희관(68,사진 5 맨 왼쪽) 전 이장이 돌아가신 아버님(고 김운형)이 지니고 계시던 사진을 경로당에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 씨는 “동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사진 속 인물들과 이야기를 알지 못할 것 같아서 윤석주 어르신께 보여 드렸더니 귀한 사진이라고 해서 신문사까지 연락하게 됐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가마 짜기 대회 사진 외에도 몇장의 사진이 더 있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사진 아래 흰글씨로 ‘송악민병대’라 적힌 사진이다. 귀퉁이에 ‘4287. 1. 6’라고 써있는 걸로 봐서 1954년 1월6일에 찍은 사진인 듯 하다. 첫째줄 오른쪽에서 7번째에 서 있는 검은 바지에 흰 저고리와 검은 조끼를 입은 이가 윤석주 씨다.
윤 씨는 “해방 이후 송악 젊은 이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했었는데 당시에 기념으로 찍은 사진 같다”고 회상했다.
네 번째 사진은 지금의 상록초등학교 전신쯤 되는 송악분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사진이다.
윤 씨는 첫째줄 맨 왼쪽에 앉은 이가 심훈 선생의 조카 고 심재영 씨 같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교육청 같은 게 있었나는 모르겠는디... 이때 학교는 마을 사람들이 기성회를 조직해서 아이들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어. 그때 심재영 씨가 기성회장을 맡았었지.”
사진을 공개한 김희관 씨는 “윤석주 씨 같은 동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옛날 마을에 얽힌 역사를 알 길이 없게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